어떤 사람의 두뇌가 육체에서 분리돼 두뇌를 계속 살아 있게 해줄 영양분이 가득 찬 용기 속에 담겼다.
이 두뇌의 신경조직은 초과학적 컴퓨터에 연결돼 있다.
컴퓨터는 이 두뇌에 모든 것이 완벽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환각을 준다.
이 두뇌에게 세상은 실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험된 모든 것은 컴퓨터의 전자자극일 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의 모티브와 유사한 이같은 상황은 H 퍼트남(하버드 대학 철학과 교수)이 상정한 '통 속의 뇌' 가설이다.
통 속의 뇌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두뇌작용의 산물에 불과하다.
물리적 실체는 없고 비트 단위의 정보만 존재할 뿐인 것이다.
퍼트남의 가설에서 '자아'나 마음, 정신은 결국 두뇌와 동의어인 셈이다.
매트릭스와 같은 대다수의 SF영화들이 기본적 전제로 삼고 있듯이, 만일 우리의 마음이 인공지능(컴퓨터 프로그램)과 같은 것이라면 몸과 분리돼 독자적으로 존재하다가 어느 몸이나 체계에라도 이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A라는 사람의 두뇌 속 정보가 B라는 사람의 두뇌 또는 C라는 슈퍼컴퓨터에 이식될 경우 A와 B, C는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별개의 존재인가.
물론 위의 질문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가정일 뿐이지만 인간이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사이버스페이스와 인공지능의 출현을 맞아 더욱 난해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컴퓨터과학, 정보과학, 전자공학, 유전공학 등 첨단과학기술에 의해 인간은 정보 단위(비트)로 환원되거나 해체돼 가고 있다.
컴퓨터 과학기술에 의해 가능해질지도 모를 인공지능과 사이보그 및 사이버 자아(사이버공간에서의 행위자)에 과연 인격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이화여대에서 심리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김선희 연구교수는 저서 '사이버시대의 인격과 몸'(아카넷 대우학술총서)을 통해, 사이버 시대를 맞아 '인격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꺼낸다.
몸을 지닌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윤리적.도덕적 책임을 지닌 인격적 존재라면, 물리적 몸을 초월한 사이버자아의 인격성은 어디까지 인정돼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인격과 몸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저자는 보았다.
저자에게 있어 인격이란 몸과 두뇌의 의식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것이다.
도덕적 책임주체일 수밖에 없는 인격은 신분 확인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므로, 책임주체의 신분을 확인할 길 없는 존재에게 책임을 귀속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공지능과 사이버 기술이 낳은 사이버 존재들은 책임 주체로서 몸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인격 개념을 적용할 근거를 상실한다는 논리이다.
이 책은 한편의 긴 논문을 보는 듯하다.
철학용어와 신기술용어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일반독자가 읽기에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저자의 결론도 논쟁을 부를 소지가 없지 않다.
저자는 또한 '자아' 또는 '인격'에 집요하게 천착하지만 가장 오래된 인식론적.존재론적 사유방식 중 하나인 불교 등에서는 아예 자아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이버 자아의 인격적 지위에 대한 논의는 결국 우리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길과 동의어이다.
우리가 미래에도 도덕주체이며 인격적 존재로 남아 있으려면 물리적 몸과 몸의 통일성을 보존하며 몸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저자의 역설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김해용기자 kimh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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