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저녁을 먹고 금방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잘 때가 있다.
삶의 의미라던가 오늘의 반성같은 건 나 몰라라 하고 육체로서의 잠 속에만 빠져버리는 것이다.
대체로 다음날 아침이 되어야만 눈을 뜨지만, 묘하게도 밤 한 시나 두 시 사이에 문득 깨는 날이 있다.
아침으로 금방 이어지는 날은 잠이 부족하지 않았는데도 이튿날은 하루내내 피곤하다.
정신의 잠과는 거리가 먼 육체성만이 강조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 시나 두 시, 홀로 깨어 있으면 마음은 한없이 깊은 곳까지 내려간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뒤척여 보기도 하지만 의식은 이미 이것저것 사소한 것부터 반추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견디지 못하면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나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 날은 어쩔 수 없이 자신과 자신의 삶이 누추해진다.
식구들이 깨지 않게 몰래 빠져나와 차의 시동을 걸고 무작정 돌아다닐 시간이다.
마음은 벌써 한없이 약해져서 사소한 음악에도 울컥 눈물이 앞장을 선다.
우주에서 온전하게 홀로라는 적막에 몸을 맡겨야 하는 운명에 휩싸인다.
그런 밤은 내 차는 몽환을 뒤따라간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몽환이란 결핍의 다른 창이다.
그렇기에 거리도 불빛도 모두 색조를 띤다.
몽환이 바꾼 색조이니까 대체로 무채색이다.
차창을 열어 밤의 대기가 얼굴을 때리면, 밤과 자신이 곧장 연결된 것도 알겠다.
우주가 감기 걸린 것도, 별빛이 흐린 것도 내 탓인 줄 알겠다.
문득 차를 세우면 고양이가, 고양이의 울음이 거리의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다.
아니 내 맘의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다고 해야 옳다.
무언가를 할퀴려고 발톱을 드러낸 게 아니라 그 밤이 몽환적이라는 걸 알려주려고, 내 삶의 귀퉁이를 고양이는 제 검은색으로 장식한 것이다.
그런 어느 날 내 차는 느린 트럭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한 차로를 완전 점령하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트럭은 내 몽환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속도로 달렸다.
차로를 바꾸어 트럭을 추월해 가는 내 시야에 붙잡힌 것은 트럭 앞의 휠체어였다.
휠체어를 탄 소녀였다.
그러니까 소녀는 지금 산책을 즐기는 중인 것이다.
뒤에서 비춰주는 트럭 전조등의 빛을 빌려 느린 산책 중인 것이다
아마도 트럭운전사는 아버지이리라. 소녀가 타고 있는 휠체어! 휠체어 탄 소녀는 긴 머리카락, 머리칼은 지금 새벽 2시의 시침처럼 검은색이다.
잉카의 미라 소녀가 왜 떠올랐을까. 아마 그건 의식(儀式) 때문이지 않았을까. 잉카의 미라 소녀도 의식의 희생양이라고 들었다.
무릎 구부리고 얼어죽은 그 소녀의 사진에서 도드라진 것은 검은 머리칼이었다.
머리칼은 아직도 싱싱하여 소녀의 애환을 감싸고 있었다.
휠체어 탄 소녀의 검은 머리칼도 그러했다.
의식처럼 느리고 말없는 동작들. 당연히 내 차도 그 의식에 흔들리며 느릴 수밖에 없었다.
검은 머리칼의 밤이다.
휠체어에는 헤드라이트가 없지만 소녀의 아비가 뒤에서 비춰주는 트럭 전조등의 힘으로 길은 불켜진 터널이다
불켜진 비닐하우스 같다.
저 환한 슬픔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캄캄한 밤의 고독한 의식이 만난 이 환한 장면전환은 내 삶을 자꾸 비웃는다.
부녀이리라 믿어지는 두 사람이 만드는 이토록 느리고 환하고 슬픈 장면에 내 의식은 바닷가의 바위를 때리는 파도의 포말처럼 끊임없이 부딪친다.
트럭의 속도는 마흔 살 쯤되는 트럭 운전사의 주름살처럼 느리다 못해 정지한 듯한 순간들로 이어진다.
한땀한땀 힘겹게 수놓은 십자수의 간격이다.
트럭 옆에 내 차를 동행시키기도 했지만, 느림의 반대쪽인 내 오랜 다급함이 그때처럼 역겨워진건 당연하다.
느림도 들끓는 마음으로 짐작해보는 내 습관도 역겹다.
느닷없이 잠에서 깨어나 가슴 저리도록 마음의 밑바닥으로 내려가고픈 밤에 만난, 이 광경은 내 고독감도 치유될 수 있다는 위안을 준다.
한 밤중에 자신에게만 속삭이는 고독감마저도 저 인간의 따뜻한 사슬을 만나면 눈녹듯 사라지니까, 분명 고독은 사랑의 아랫갈래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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