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개혁-(8)화양동 서원

조선 후기의 여러 서원 중에 가장 폐단이 큰 것은 청주 화양동 서원이었다.

임진왜란 때 구원군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1572~1620)을 제사하는 만동묘(萬東廟)가 있다는 이유로 화양동 서원은 지방관은 물론 국왕보다도 위에 있었다.

명나라 신종은 환관들을 전국 각지에 보내 광세(鑛稅), 상세(商稅)라는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은을 수탈함으로써 악명놓은 '광세지폐(鑛稅之弊)'를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조선의 서인(노론)들에게는 나라를 다시 살려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황제였다.

그러나 신종은 사실상 집권 노론에 의해 '황제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가장 좋은 대상이었을 뿐이다.

'사족(士族)이 있는 곳마다 평민을 못살게 굴지만 그 가장 심한 곳이 서원이었다.

편지 하나를 띄워서 먹도장을 찍은 다음 고을에 보내 서원제수전(書院祭需錢)을 바치도록 명령했다.

사족이나 평민을 물론하고 그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주머니를 쏟아야 했다.

…화양동 서원 같은 곳은 그 권위가 더구나 강대하여 그곳에서 보내는 편지를 화양동 묵패지(墨牌旨)라 하였다.

백성들은 앞서부터 탐학한 아전들로부터 시달렸는데 여기에 또 서원 유생으로부터 침탈을 당하게 되니 모두 살아갈 수가 없었다.

(박재형, "근세조선총감(1886)")'

대원군의 낙백 시절 이 지역을 지나다 화양동 유생들에게 붙잡혀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에 화양동 서원을 철폐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러나 이 일화가 실제인지 중국 한신의 고사를 응용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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