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잊혀진 문화유산-경주시 석장동 금장대

그 옛날 선사시대 부족민들은 바위에 그림을 그려 신에게 소원을 빌었다.

경주시 석장동 금장대 바위그림이 당시 생활상을 엿볼수 있는 대표작품. 제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공간인 성역(聖域)에 그려진 방형기하문, 삼각형기하문, 원형다공문, 사람발자국, 여성생식기, 배, 사냥모습 등 다양한 바위그림들은 당시 부족민들이 모든 것을 신에게 의존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장대 바위그림은 지금까지 발견된 바위그림 유적 중 한 유적내 문양개체수가 가장 많다.

이런 여러 문양들은 당시 부족민들이 신에게 기원하기 위한 그들의 집단적 의사표시를 표현한 언어이자 문자이다.

고고학계는 금장대 암각화를 우리 역사를 삼국시대로부터 선사시대로 올려놓은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병풍처럼 놓여있는 수직 암벽

국립문화재연구소 오춘영(吳春泳)학예연구사는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유적조사팀에 의해 확인한 바위그림 문양은 방형기하문을 비롯 모두 93개이나 바위의 마모가 심하기 때문에 실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바위그림이 있는 절벽은 금장에서 동국대로 가는 석장 고개를 북단으로 하여 남으로 전개되어 있고 남과 북의 두봉우리로 형성되어 있다.

남북 길이 0.5km, 동서 0.3km이며 북쪽 봉우리의 높이가 90m, 남쪽봉우리가 70m정도의 구릉성 산지다.

그러나 산의 이름은 없고 언젠가 이곳에 세워져 형산강의 지류인 서천과 북천의 합류지점인 '예기청소' 주변의 멋들어진 자연경관과 더불어 경주지방의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을 금장대라는 정자 이름이 산이름을 대신하고 있다.

1994년 3월 이곳 남단에 병풍처럼 놓여있는 수직의 암벽에서 청동기시대의 문화를 밝혀줄 암각화의 유물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예기청소(藝技淸沼)와 삼기팔괴(三奇八怪)의 하나인 금장낙안(金藏落雁)으로 더 유명하다.

예기청소는 신라 제20대 자비왕 때 을화(乙花)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희를 즐기는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경주지방 사대부들이 기생인 예기들과 풍류를 즐기던 푸른 소(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다른 예기청소 설화는 신라시대 귀족의 딸인 예기라는 처녀가 결혼을 앞둔 단오절에 친구들과 금장대에서 소나무에 매어둔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 강물에 빠져 죽은 후부터 매년 익사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느 이야기도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여름철이면 낚시를 하거나 멱을 감다가 익사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김동리 소설 '무녀도'에서도 금장대 예기청소의 애환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금장대의 남단은 모량천과 기린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서천과 토함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명활산을 거쳐 경주시내로 흐르는 북천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어 때로는 장엄한 분위기마저 느낀다.

#구릉지일대 금장사지 터 확인

남북으로 이어지는 이 구릉지일대는 구전으로 전해오는 금장사지 또는 금장대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금장대 바위그림은 넓은 범위에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바위그림들 중 울산 대곡리를 제외하고 그 문양개체수가 가장 많은 다양한 문양들을 가지고 있는 유적이다.

바위그림이 있는 바로 위쪽의 구릉에서는 무문토기편, 반달돌칼편, 홈자귀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인 동국대 경주캠퍼스내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취락지가 발견되었고 근처에는 석장동지 석묘군이 있다.

이 유적들은 모두 반경 1km이내에 있어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남긴 유적이라는 설명에는 큰 무리가 없는 것 같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심영섭 학예연구실장은 "암각화를 통해 당시 경주, 울산 부족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수 있다"며 "역사성이 있는 금장대 암각화가 마모가 날로 심해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주.박준현기자 jhpar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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