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꽃들의 시대다.
동백꽃이나 수선화, 살구꽃이나 목련과 같은 봄꽃들이 소요음영하기에 준수한 면모를 갖추고 있으나 예로부터 우리 선인들은 봄꽃들의 으뜸으로 매화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듬성듬성 날리는 눈발 속에 해정한 가지를 드리우고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피어난 몇 송이의 꽃. 그 꽃의 향기가 한없이 깊고 아늑했다.
꽃이 핀 나무의 등피가 또 볼 만했다.
묵을 대로 묵어 쩍쩍 갈라터진 매화의 등피는 얼핏 고난에 찌든 민초들의 삶을 보여주고 남음이 있었다.
혹독한 가렴주구의 시간을 뚫고 피어난 몇 송이의 꽃과 등피를 보며 뜻깊은 경세가들은 새로운 세상의 꿈을 한폭의 서화에 은밀히 새기기도 했던 것이다.
추사의 제자인 우봉 조희룡은 그의 저서 '호산외사'에서 우리 선인들이 얼마나 매화를 사랑했는가에 대한 일화를 하나 남겨 놓았다.
주인공은 단원 김홍도. 어느날 단원의 집에 한 상인이 매화분을 팔러왔다.
넋을 빼앗길 만큼 고아한 격을 지닌 매화였으나 끼니를 끓일 돈도 없는 단원에게는 그림 속의 떡이었다.
마침 그림을 사러 온 사람이 있었는데 3천냥에 그림을 판 단원은 2천냥에 매화분을 사고 8백냥으로는 좋은 술 여러 말을 사서 친구들을 불러 들여 매화음을 짓고 놀았으며 남은 2백냥으로 쌀과 땔나무를 들여 놓았다는 것이다.
눈여겨 볼 점은 단원이 그림을 '팔았다'는 점이다.
옛 화사들은 대부분 그림파는 것을 큰 수치로 알았다.
마음에 드는 매화를 구하기 위해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판 선인의 일화는 거꾸로 그들이 얼마나 매화를, 그 정신을 귀중히 여겼는지 잘 보여준다.
주말에 나는 18번 국도를 아들과 함께 걸었다.
섬진강과 보성강이 교차하는 그 지점은 예부터 물오리들의 비상하는 울음소리가 푸른 비와 같다고 해서 압록이라 불리는 곳이다.
매화꽃들이 강을 따라 피어 있었다.
곧 고등학생이 될 아이는 새 꽃의 향기를 생각보다 좋아했다.
꽃가지에 코를 대고 흠흠 맡아보다가 꽃 한 송이를 따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 풍경을 보고는 소리를 쳤다.
"저것 좀 봐요. 강물 속에도 꽃이 피었어요".
아이의 말이 맞았다.
강물 속에는 산그림자가 들어 있었고 꽃 핀 매화 나무들이 물살 속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그 강의 지난 계절의 모습을 안다.
꽁꽁 얼어붙어 흐르지도 못하던 강. 그러나 그 강의 내면 어딘가에는 혹독한 계절의 채찍을 이겨내고자 하는 순박하고 질긴 열정들이 불타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강과 매화는 같은 열정으로 지난 시간들의 핍진함과 싸웠을 것이다.
그 싸움의 뒤편에 찬란한 계절의 향훈이 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고난의 순간들이 내재해 있다.
생명의 의미란 다름 아닌 그 고통과의 지난한 싸움에 대한 기록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삶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가만히 꽃핀 들판을 생각해 보자. 그 꽃들이 견디어 낸 계절의 고통과 고독에 대해서도, 그리고 내게 찾아온 고통의 시간들에 대해서 내가 회피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부딪치며 싸워왔는가도 솔직하게 생각해 보자.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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