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신문의 날'에 생각한다

방송과 신문이 싸우고 있다.

또 신문과 신문이 싸우고 있다.

전직 언론인이기도 한 나로서는 오늘 '신문의 날'을 맞으면서 금석(今昔)의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언론기관은 독자와 시청자의 존재를 존립의 기초로 하기 때문에 상호경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옛날엔 이렇게 결사적이지는 않았다.

라이벌 의식으로 우발전쟁이 나도 단기전으로 그쳤지 지금처럼 몇 해를 넘겨 끝없이 싸우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이런가? 그때와 지금 간에 무엇이 크게 다르기에 이렇게 되었는가? 언론과 관련해서 달라진 게 있다면 언론자유가 나아진 것을 들 수 있겠다.

그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옛날 언론 및 언론인들은 언론자유가 신장되었으면 하는 공통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동업자(同業者) 또는 동지로 생각했다.

이러한 동지의식은 정치를 초월했다.

노조 문제로 갈등을 빚은 일은 있었지만 여당지라는 이유로, 또는 야당지라는 이유로 서로를 비난하는 일은 없었다.

기자들도 다른 기자의 소속사가 여당지, 또는 야당지라는 이유로 서로 반목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런 현상은 분명 오늘에 되살려내야 할 미풍양속이다.

정치 때문에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접할 수 없게 된대서야 어디 될 말인가? 이런 바람을 한 현직 언론인에게 얘기했더니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동지의식은 심지어 한 회사 내부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였다.

세속의 폐풍인 세대갈등이 세속을 선도해야 할 언론계에도 어느새 이렇게 만연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노장세대의 수고와 고뇌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한 사람으로서 젊은 언론인들에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언론자유가 과거보다 훨씬 신장돼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그 공만은 선배 언론인들의 것으로 인정해줘야 한다.

백주의 테러를 당하면서까지 정론을 굽히지 않았던 것도, 그리고 이른바 언론윤리위원회법이란 정부악법에 끝까지 맞서 이를 물리친 것도 그대들의 선배였다.

나 개인의 예를 들어 얘기 하는 일이 다소 부담스럽지만 1972년 10월 31일 계엄 당시 야당지 D일보에서 편집을 하던 나는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철야 고문을 당했다.

유신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공고되었는데 그 중 '찬반활동금지'라는 대목이 있어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린 채 투표를 시키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내 양심에 따라 그것을 1면 톱으로 올렸더니 그것이 계엄군의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그대들이 누리는 상당 부분의 언론자유는 유명 무명의 선배들, 그리고 그들의 크고 작은 여러 고충과 노고가 바탕에 있음을 외면해선 안된다.

미국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한 소년을 만나 몇가지 당부를 했을 때 그 소년이 "할아버지,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현대'란 말이에요"라고 대꾸했다.

이에 포드가 말했다.

"얘야, 그 '현대'란 바로 내가 발명한 거란다".

사실 그렇다.

현대 대량생산의 포문을 연 것이 바로 그의 포드시스템이 아닌가. 세상 일이란 잊을 것도 있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라도 그대들이 함께 지면을 만드는 사내(社內) 선배들의 연령을 문제 삼는다면 그것은 언론의 할 바에 대하여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다.

언론은 근육질적 체력을 필요로 하는 건설노동 현장도, 씨름판도 아니다.

젊은 박력과 원숙한 경륜이 다 같이 소중하게 필요한 곳이다.

'집에 노인이 안 계시면 빌려서라도 모셔라'(그리스 격언)는 충고가 그대로 들어맞는 곳이 바로 언론계이다.

세대간에 생각의 차이, 문화의 차이, 비전의 차이, 그리고 취미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이 차이가 인류를 불행하게 한다는 증거도 없고 문명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증거도 없다.

따라서 세대간의 차이를 갈등으로 볼 필요도 없고 이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애를 쓸 이유도 없다.

오히려 언론기관이야말로 이 차이를 솔직히 인정하고 역으로 그 차이를 선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예컨대 어느 언론기관이든 "우리 회사에는 생각이 다른 노-장-청의 멤버들이 골고루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지면(화면)에서는 그들이 내는 각자 다른 목소리가 한 치의 편향도 없이 함께 전해질 것입니다"라는 홍보를 해 보라.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하여보라. 이러한 '세대차이의 무기화(武器化)'는 다양한 독자와 시청자를 폭넓게 확보하는 왕도(王道)가 될 것이다.

신문 안 보기니, 방송뉴스 끄기니 하는 심히 듣기 거북한 말들이 언론계에 가해지고 있는 것을 언론계 종사자들은 가볍게 듣지 말아야 한다.

그것도 100% 정치에 관한 언론 성향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 아닌가. '신문의 날'을 맞아 더욱 서글퍼지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정치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에 앉아서 이런 저런 훈수를 해야 할 언론이 어떻게 정치권을 위한 벽제( 除)꾼처럼 여겨지게 됐는지 우리 한번 숙고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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