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선 선비들의 '마니아 기질'

미쳐야 미친다? 감이 잘 안 잡힌다. 표지 배경 글씨로 희미하게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한자를 발견한 뒤 그제서야 '아!' 머리를 쳤다. '어느 한 분야에 미칠 정도로 몰두해야만 경지에 도달한다'는 뜻이 아닌가.

'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18세기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열정과 광기를 탐색하고 있다.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옛글 속에서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내면풍경을 길어 올린다.

#공통점은 '안티'또는 '마이너'

흥미로운 것은 허균 권필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김득신 등 책의 등장 인물 대부분이 당대의 '메이저'들이 아니라 주변을 아슬하게 비켜갔던 '안티' 또는 '마이너'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한 가지에 몰두하는 힘으로 우뚝한 업적을 남겼지만 모두들 고달픈 삶을 살았다.

꽃에 미친 김덕형,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았던 정철조, 담배를 너무 좋아해 담배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책을 만든 이옥, '백이전'이라는 책을 11만3천번이나 읽은 독서광 김득신 등 질곡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던 옛 선비들의 치열한 자기 확신과 주인된 삶도 책은 소개한다.

책 속 선비들의 '마니아 기질'은 상상을 초월한다. 화가 이징은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눈물을 찍어 그림을 그릴 만큼 그림에 미쳤고, 최흥효는 과거 시험을 보다가 우연히 왕희지와 비슷하게 써진 자신의 글씨에 도취돼 답안지를 제출하지 못하고 귀향했다.

#같은책 11만3천번 읽어

다산 정약용은 그 누구보다 다정다감하고 가족에 대한 애틋한 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유배지에서 다산은 아내가 자신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잘라 자식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치마는 아내가 병을 앓다 죽자 자식들이 보내 온 것이었다. 또한 자식 6명을 역병으로 잃은 참담함을 달래기 위해 그는 훗날 천연두의 치료법을 자세히 기록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지었다.

정약용은 스스로 둔재라고 자책하고 있는 15세 소년 황상과의 첫만남에서 "둔한 끝으로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는 큰 구멍이 뚫린다. 천착은 부지런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황상은 스승의 이 가르침을 평생 두고 잊지 않았다. 훗날 예순을 눈 앞에 둔 나이에 꼬박 18일을 걸어와 스승의 묘 앞에서 눈물을 뿌리는 황상의 손에는 스승이 예전에 준 부채가 들려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짧은 편지글에는 특유의 톡쏘는 풍자와 촌철산인의 해학이 빛을 발한다.

#고전도 코드만 바꾸면…

'문전에는 빚쟁이가 기러기 떼처럼 섰는데 집안에는 취한 사람 고기 꿰미처럼 자고 있네. 이제 저는 추운 집에서 홀로 지내니 담당하기 입정에 든 중 같군요'. 연암이 셋째 자형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중국의 시를 슬쩍 끌어다가 빚독촉에 몹시 시달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장황하긴 해도 몹시 궁하니 돈 좀 빌려달라는 내용이다. 박지원은 돈을 꿔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도 돈 이야기는 일절 않는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한다. 피차에 구김살도 없다.

저자는 고전도 코드만 바꾸면 얼마든지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세워 시대의 앙가슴과 만나려했던 이들 마니아의 삶 속에 자신을 비쳐보면, 스산하고 본받을 만한 사표(師表)도 없는 이 시대를 사는데 작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해용기자 kimh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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