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태초에 악기가 있었다"라는 말로 치환해도 무방하리라. 1980년대 후반 고고학자들은 프랑스 남서지방의 선사시대 동굴을 탐사할 때 노래를 불렀다.
크로마뇽인들이 그린 동굴 벽화가 가장 많이 분포된 곳이 바로 소리 울림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사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는 뼈로 만든 플루트가 발견됐다.
인간과 음악.악기는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다.
인간의 뼈로 만든 그로테스크한 악기는 요즘 시대에도 있다.
네팔의 라마교도들은 어린아이의 두개골을 몸통으로 쓴 작은 북 '다마루'(Damaru)와 허벅지뼈로 만든 '르캉 글링'(Rkang-gling)이라는 피리를 의식에 쓴다.
이 악기는 몹쓸 병에 걸려 죽었거나 비명횡사한 미혼남녀의 뼈만 재료가 될 수 있다.
이 악기를 제례에 사용함으로써 희생자가 무거운 업보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케냐의 '말하는 드럼'(talking drum)은 특정 단어의 억양과 높낮이까지 소리를 낼 수 있어 마치 모르스 신호처럼 멀리 떨어진 부족원들에게 의사를 전달한다.
동부 아프리카의 '마센고'(masengo)와 '엔딩기니'(endinggini) 같은 악기들도 인간의 음색마저 흉내낼 수 있어 때로 대화에 사용된다.
1978년 출토된 중국 후베이 지방의 편종은 알려진 모든 악기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전체 길이 12m, 최고 높이 2.7m인 이 편종은 65개의 청동 종이 달려 있는데 이중 가장 큰 것은 152cm 높이, 203kg짜리이다.
종을 만드는데 쓴 청동은 총 2.5t. 모두 130음을 낼 수 있는데 2천500년 전 초나라때 만들어진 이 거대한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6명의 연주자가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종을 쳐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악기가 될 수 있다.
그로기 상태인 권투선수에게는 라운드의 끝을 알리는 공 소리 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가 있을까. 전국노래자랑의 실로폰 소리는 '딩동댕동'과 '땡' 두 소리만으로도 출연자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경험케 한다.
현대음악계의 거장 존 케이지(1912~1992)가 지은 〈" "(4분33초)〉는 침묵도 악기임을 일깨워준다.
3악장으로 된 이 곡의 악보에는 'TACET'(휴지.休止)라는 글자가 적혀 있을 뿐이어서 연주자는 4분33초 동안 단 한개의 음표도 연주하지 않는다.
청중은 가만히 앉아서 청중의 기침소리나 소근거림, 외부의 소음 등에 귀를 기울인다.
연주 현장에서 그냥 만들어진 소리가 바로 〈" "(4분33초)〉인 것이다.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 때로 침묵은 웅변보다 많은 것을 설한다.
'설국'(雪國)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침묵을 존중했다.
어떤 강연회에 초청된 그는 "내가 말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장장 90분간 의자에 앉아 침묵했다.
이윽고 시간이 다 되자 그는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잠시후 강연회에 모인 청중은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김해용기자 kimh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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