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어진 한편의 범죄 미스터리 영화는 관객과 감독의 한판 두뇌싸움이다.
반전영화의 교과서로 알려진 '유주얼 서스펙트'나 멀쩡하게 유령과 얘기하던 주인공이 진짜 유령이었던 '식스 센스' 등 막판에 관객뒤통수를 때리며 감독의 승리로 돌아가지만 이런 거짓말(?) 영화는 관객들 입장에서도 짜릿한 패배다.
그런 짜릿함을 즐기는 영화팬들에게 희소식이다.
감독과 관객간의 IQ싸움을 부채질할 동.서양의 영화 두 편이 15일 나란히 극장가에 이름을 올리기 때문.
◇범죄의 재구성
'처음 90분은 감독의 승리, 마지막 30분은 관객의 승리'. 한국영화 '범죄의 재구성'(최동훈 감독)은 모처럼 관객들을 제대로 주무르는 사기꾼 영화다.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라는 영화 포스터의 카피처럼 이 영화는 관객이 뭘 원하는지를 훤히 꿰뚫고 있다.
영화의 기본 얼개는 사기꾼 5명이 한국은행 금고에 보관된 50억 원을 턴다는 것으로 할리우드의 '스팅'이나 '오션스 일레븐'을 연상시키지만 외국 영화와는 색채가 다른 한국적인 현실감으로 관객을 사기극에 동참시킨다.
영화는 도입부분에서 이 사기극의 결말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사기전과범 최창혁(박신양), 사기꾼의 대부 김 선생(백윤식), 떠버리 얼매(이문식), 제비 김철수(박원상), 위조기술자 휘발유(김상호) 등 5인조 사기단은 한국은행을 턴 뒤 50억 원을 빼내는데 성공하지만 제보 전화 한 통으로 인해 또 다른 사기극에 휘말린다.
주모자 최창혁은 불탄 시체로 발견되고, 얼매와 휘발유는 경찰에 잡히고, 돈의 행방은 묘연하고….
여기서부터 감독과 관객의 머리싸움은 시작된다.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감독은 사기단의 시선과 이들을 수사하는 형사의 시선을 교차해서 현란하게 카메라를 움직이고, 최창혁의 형 창호(박신양 1인2역)와 김 선생의 동거녀 서인경(염정아)을 등장시키는 등 범죄의 단서를 여기저기 흩뿌려 놓는다.
영화 제목처럼 감독이 맘먹고 범죄를 재구성했으니 관객의 패배는 당연지사. 하지만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범인을 끝까지 숨기기에는 역부족인 듯. 이때부터 영화는 '유주얼 서스펙트'에서처럼 그 기막힌 반전에 대한 기대감이 사그라진다.
특히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는데 경찰은 끝까지 헤매는 것으로 설정하다보니 영화가 완벽하게 재구성된 퍼즐이라고 보기엔 무리수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국영화계에 흔치 않는 작품이다.
누가 주연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대여섯 배우들의 완벽한 팀플레이와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빈틈없이 짜여진 치밀한 연출은 관객들을 영화 내내 긴장 상태에 있게 만든다.
또 이런 장르의 영화가 갖춰야할 미덕들을 골고루 포장했다.
꼬이고 또 꼬이는 사건들, 앞의 사건과 뒤의 사건이 맞물리면서 정신 없이 돌아가는 줄거리와 분할되는 화면을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비슷한 장르의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줄 수 없는 이 영화만의 독특한 재미는 또 있다.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사기꾼의 은어들이 생생하게 스크린을 누비는 것. "청진기 대보니까 진단이 딱 나온다.
시추에이션이 좋아" 등등. 후문에 의하면 최 감독은 3년 동안 전국의 경마장과 도박판을 다니며 이 은어들을 익혔다고.
◇테이킹 라이브즈
영화 '범죄의 재구성'이 누가 범인인가를 쫓는다면 할리우드 연쇄살인 스릴러 '테이킹 라이브즈'(Taking Lives.D J 크루소 감독)는 '누가'보다 '왜'에 초점을 맞춘다.
이 영화가 범인과 수사관의 쫓고 쫓기는 긴박감보다 영화상의 큰 반전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연쇄살인범은 잡을 수 있지만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을 만들어낸 사람을 잡을 수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과 주체성, 그리고 이런 범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좀더 깊이 있게 다뤘다". D J 크루소 감독의 이 말은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결국 연쇄살인범을 쫓는 FBI 수사관이라는 뻔한 이야기가 될 위기에 처한 이 영화는 감독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흥미로운 설정으로 살아난다.
살인을 저지른 후 희생자의 신분으로 살아가다 싫증나면 다른 희생자를 찾아 다시 그 신분으로 바꿔 타는 연쇄살인범, 기존의 수사방식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직관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여성 FBI 프로파일러, 그리고 사건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과의 로맨스 등…. 범인과 수사관의 치열한 두뇌게임은 감독과 관객으로 옮겨져 영화의 짜릿함을 더한다.
더욱이 이 영화의 출연진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배우와 감독으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연기파 배우 에단 호크, 제2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개성파 연기자 키퍼 서덜랜드의 조화는 이채롭다.
그러나 이미 '본 콜렉터'에서 스릴러를 경험한 적이 있다지만 여전히 이쪽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툼 레이더'의 여전사 안젤리나 졸리의 등장은 눈에 거슬린다.
그래도 할리우드가 그녀를 택한 이유는 곧 확인된다.
영화 속 그녀의 캐릭터는 '차가운 감각의 명수사관'이겠지만 도톰한 입술이 트레이드마크인 그녀의 능력은 날카로움보다는 아찔한 러브신에서 빛을 발하게 되니까.
이 영화는 '양들의 침묵', '한니발'을 곁눈질한 듯한 느낌이다.
마이클 파이의 원작에도 없는 여수사관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부터 조디 포스터를 의식한 흔적이 엿보인다.
영화 내내 어디선가 본 듯한 식상함을 감출 수가 없을 정도.
게다가 최근 존 쿠샥이 열연해 돋보인 '아이덴티티'의 반전 이상을 기대하라는 감독의 말은 과장이라도 좀 심한 것은 아닐까. 일정 몫의 기대를 채우는 평범한 액션 스릴러라는 평가가 적절한 표현일 듯 보이니까.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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