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30분 현풍휴게소에서 만나요".
낮잠이나 자면서 일요일을 어영부영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화창한 봄 나들이하기에 그만인 날씨인데….
아줌마 몇 명과 아이들이 놀러 간다기에 한번 따라가 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 이력이 나있다는 아줌마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나눠주는 프린트물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미리 짜놓은 답사 코스대로 방문지를 소개하는 내용과 사진 등이 일목요연하게 담겨 있었다.
창녕박물관-교동고분군-창녕 석빙고-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술정리동삼층석탑.
'놀러 가는 게 아닌가?' 의아해 하며 따라가 보니 창녕박물관에서 문화유산해설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창녕은 문화유적이 참 많은 곳입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문화유산해설가의 구수한 설명이 시작되자 장난치느라 정신이 없던 아이들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줌마들과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크고 작은 아이들이 열심히 설명을 듣는 모습에 궁금한 듯 문화유산해설가는 "단체 이름이 뭐냐?"고 묻는 거였다.
빙긋이 웃음짓는 아줌마들의 대답은 "이름 없는대요…".
평범한 주부들이 문화유적 답사 전문가 못잖게 알찬 프로그램을 짜 스스로 여행을 다닌다는 사실에 놀라는 이들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아줌마 6명이 각각 둘씩 딸린 아이들까지 데리고 스스로 답사 여행을 다닌 지도 어느덧 만 3년이 지났다.
대구에서 가까운 곳부터 직접 차를 몰고 가거나 버스, 기차 등을 이용해 다니기 시작한 이들은 이제 먼 거리로 이동할 때는 관광버스까지 대절한다.
이들이 여행을 나선다는 소문이 나면 성서 등 각지의 아줌마들이 몰려들어 버스 한 대 채우기는 문제도 아니다.
"처음엔 남편이 차 운전을 안 해주면 집밖으로 못 나서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한두번 나가보니 '운전사' 없어도 문제없더라구요".
이들 아줌마들에게 "놀러 가자"는 말은 유익한 답사여행을 뜻한다.
직장 일로 피곤해 일요일에 쉬고 싶어하는 남편에게 억지로 나가자고 조를 필요없이 이들은 배낭 하나 둘러메고 집을 나선다.
부여, 거제, 포항, 영덕, 대전…. 아이들이 피곤해 하지 않도록 당일치기로 아침 일찍 출발해 차가 밀리지 않는 오후시간에 일찍 돌아오는 것이 기본이다.
아무리 먼 곳도 새벽 5, 6시에 출발해 밤 9시 전에 돌아오려 애쓴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부모를 따라 나서려 하지 않는다지만 어릴 때부터 엄마랑 여행 다니는데 익숙해진 아이들은 중학생이 돼도 불평없이 잘 따라 다닌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 주부들이 모인건데 일부러 교육적인 목적을 내세우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처음 갈 때부터 대구 동산의료원 박물관, 구미 자연학습원 등 만남 장소 자체가 교육적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과 함께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구석구석을 다니며 여행 후기를 개인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는 주부 구민향(37)씨는 단순히 먹고 마시며 노는 여행은 재미있을 것 같지만 다녀오고 나면 마음이 허탈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다리가 아플 정도로 쉴새 없이 걸으며 열심히 답사여행을 하고 오면 몸은 피곤해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눈이 뜨이는 재미에 마음이 뿌듯해진다는 것이다.
바람을 쐬며 이곳저곳 답사여행을 다니다 보니 아이들이 체험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문화유적에 대해 눈을 뜨고 교육적인 효과도 나타나는 것 같아 더 마음이 흐뭇하단다.
둘째 아들 용재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때부터 업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권은수(37)씨는 "어릴 때부터 놀이삼아 다녀서인지 아이가 이제 여섯살인데도 박물관, 사찰 등에 가도 지겨워 하지 않고 관심있게 지켜본다"며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박미애(40)씨는 "아이들과 함께 가니 일정을 느슨하게 짜려고 해도 이왕 간 김에 한군데라도 더 둘러보자고 포함시키다 보면 원치 않게 강행군을 하게 된다"며 "이제는 이렇게 쉴새 없이 걷는 여행에 익숙해져 일정이 너무 느슨하면 오히려 불안해진다"며 웃음짓는다.
학교 개학하는 3월은 쉬고 방학때는 한달에 2번씩 나서기도 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남편들도 한번씩 '운전사'를 자청해 참여하기도 한다.
이때는 모처럼 참여하는 남편들을 위해 프로그램을 조금 느슨하게 짜기도 한다.
우혜정(36)씨는 "평소에는 김밥, 라면, 국밥 등 빨리 나오는 음식들로 점심을 간단히 때우지만 남편들이 참여할 땐 먹는 음식도 푸짐해져 아이들이 더 신나하는 것 같다"고 했다.
"유명 관광지로 놀러가서 고기도 좀 구워먹으려면 돈 10만원 이상 깨지는 건 보통이잖아요. 하지만 알뜰하게 다니면 생각보다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아요".
김순경(37)씨는 입장료가 관청에서 관리하는 전시관.박물관은 1천원 미만이고 사찰.전문 박물관 등 사설 운영되는 곳은 2천∼3천원선이라며 엄마와 아이들이 같이 다니는데 밥값, 교통비 등을 포함해도 3만원 정도면 넉넉하다고 했다.
"아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면서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는 김은주(42)씨는 그동안 모은 답사여행 정보와 사진들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한다.
"아이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돼야 하지 않겠어요. 대구박물관에서 개설하는 '박물관 대학'을 다니면 역사 유적.유물에 대해 눈이 뜨이는 것 같아 권하고 싶어요. 미리 여행갈 곳 군청 홈페이지에 들러 관련 정보를 찾아보고 인원이 10명 정도만 돼도 군청 문화공보과, 박물관 등에 의뢰해 문화유산해설을 부탁할 수 있어요".
이들 주부들은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기분 전환도 하고 견문도 넓히게 되니 이보다 더 가치있는 여행이 어디 있겠느냐며 입을 모았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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