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개혁-(17.끝)미래를 지향했던 정조의 개혁

스물일곱 조선 임금 중 가장 환경이 열악했던 인물은 22대 정조였다.

부친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은 그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도세자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정신병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집권당인 노론에 반대하다가 살해된 것이었다.

영조는 노론에서 즉위시킨 임금으로서 비록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그 자신이 노론 당인(黨人)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히던 영조 38년(1762) 열한 살이었던 세손(정조)은 할아버지 영조에게 관과 도포를 벗고 엎드려 "아비를 살려주옵소서"라고 빌었으나 이미 사도세자를 자신과 반대정견을 가진 정적으로 바라보는 영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세손 제거를 당론으로 삼았다.

손자마저 죽일 수 없었던 영조는 세손을 사도세자의 아들에서 이미 죽은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입적시켜 그 지위를 보존케 했는데 이는 그를 후사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노론은 이에 반발해 영조 51년(1775) 삼불가지론(三不可知論)를 제기해 정조를 제거하려 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어린 세손이 노론을 알겠는가. 소론을 알겠는가. 남인을 알겠는가. 소북을 알겠는가. 국사(國事)를 알겠는가. 조사(朝事)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하니, 홍인한이 말하기를,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이나 병조 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사(朝事)까지도 알 필요 없습니다"('영조실록' 51년 11월 20일)'

세손은 '세 가지 일을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가지론은 사실상 세손의 폐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이를 거부하고 순감군(巡鑑軍)까지 동원하는 강경책 끝에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고, 그 석달 후 사망했다.

이로써 정조는 국왕이 되었으나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이었다.

정순왕후를 비롯한 왕실, 척신세력 등 모든 정치세력이 반대파였다.

집권 노론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왕이 된 정조는 부친의 원수를 갚아야 했다.

즉위 당일 정조는 "아!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 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라며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해 노론을 경악케 했으나 그는 복수에 나서지 않았다.

정조는 '왕자(王者)의 가장 큰 복수는 훌륭한 정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화완옹주와 모친 혜경궁 홍씨의 숙부 홍인한, 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오라비 김귀주 등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일부 세력은 처벌했으나 최소한에 그치고 포용정책을 펼쳤다.

그는 부친의 복수 대신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그 묘를 영우원으로 승격시키는 등 사도세자를 높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정조는 복수 대신 미래를 지향했다.

정조는 일대 혁신이 없으면 조선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상과 정치체제, 경제체제 모두의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다원(多元) 사상체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자신은 비록 성리학자를 자처했지만 천주교에 관대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노론에서 천주교 탄압을 요구하면 정조는 '정학(正學:성리학)이 바로서면 사학(邪學:사학)은 저절로 소멸한다'는 논리로 대응했다.

성리학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학이 창궐하는 것이라는 논리로 성리학의 반성을 촉구하면서 탄압요구를 막아낸 것이다.

정조는 노론과 공존을 택했지만 노론 일당독재를 용인한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노론 일당체제를 다당체제로 전환시켜 서로 공존하는 것을 정치개혁의 요체로 삼았다.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 남인들을 중용하고, 재위 12년(1788)에는 채제공(蔡濟恭)을 우의정으로 삼았는데, 이는 100년만의 남인 정승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남인들을 중용한 것은 단지 노론에 맞서는 친위정치세력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인들에게 미래를 향한 비전과 이를 실천할 실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랜 재야 생활 덕에 남인들은 주자학 유일사상에서 벗어나 서학(西學)을 수용하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정조 역시 상당한 서학 실력 갖고 있었다.

정조가 부친상으로 여막살이를 하는 정약용에게 스위스인 선교사 겸 과학자인 요한네스 테렌츠(J. Terrenz, 중국명 등옥함(鄧玉函))의 '기기도설(奇器圖說)'를 내려주며 기중기를 만들도록 명령한 것은 정조 자신의 탁월한 과학실력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정조가 규장각(奎章閣)을 검서관에 서얼들인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서리수를 임명한 것도 시대적 추세인 신분제 완화 요구를 앞서 수용한 것이었다.

정조는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의해 등용되는 사회가 발전한다고 믿었고 이를 실천했다.

정조는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생활개혁을 정치의 모체로 삼았다.

정조가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시신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성을 신축한 것은 단지 부친을 높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조는 화성 축조를 통해 조선에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려 한 것이었다.

화성은 조선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계획도시였다.

정조는 조선사회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농업생산력 발전에서 시작된 변화는 상업과 공업으로 옮겨가 사회 전체에 파급되었다.

정조는 화성을 이런 변화를 흡수하고 선도하는 도시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 화성은 행정도시이자 상업도시가 되어야 했다.

정조가 화성 행궁 바로 앞에 삼남(三南)과 용인으로 통하는 십자로(十字路)를 개통하고 여기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조는 진휼청(賑恤廳)의 자금을 수원 사람들에게 대여해 화성 행궁 앞에 상가를 조성했다.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에 따르면 이때 1만5천 냥을 수원상인들에게 대여해 미곡전(米穀廛:곡식상), 어물전(魚物廛), 목포전(木布廛:옷감상), 유철전(鍮鐵廛:놋과 철상), 관곽전(棺槨廛:관과 곽 등 장의상), 지혜전(紙鞋廛:종이.신발상) 등의 시전을 열게 했는데 정조는 화성을 상업도시로 만들고 이를 전국에 전파하려 했다.

화성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계획적인 상업도시였던 것이다.

정조는 화성을 상업도시로만 키우려고 한 것이 아니다.

화성은 상업뿐만 아니라 농업에도 모범이 되어야 했다.

정조는 수원 외곽의 버려진 땅에 대규모 저수지인 만석거를 조성했다.

자주 범람하던 진목천(眞木川)을 막아 둑을 쌓고 최신 수문과 갑문(閘門)을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해 대규모 국영 시범농장인 대유둔(大有屯)을 건설했다.

만석거와 대유둔은 강제 노역이 아니라 임금노동으로 조성되었다.

만석거와 대유둔 건설에 많은 유민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에게 음식과 술을 파는 상인들까지 몰려 흥성거렸다.

정조 19년(1795) 무렵부터 대유둔에서 농경이 시작되었는데, 토지의 3분의 2는 장용외영의 장교 서리와 군졸, 관예 등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3분의 1은 가난한 수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둔소(屯所)에서 소를 비롯한 모든 농기구를 제공했는데 농부 2명이 소 1마리를 사용할 정도로 풍족한 것이었다.

장용영 병사들은 둔전(屯田) 경작에 참여해 병농일치의 이상을 실천했다.

이제 군역은 힘들고 괴로운 천역(賤役)이 아니라 이익이 남는 즐거운 일이었다.

측우기를 활용하고 수문과 갑문, 그리고 수차(水車:龍骨車, 龍尾車)같은 과학적 수리기구를 활용해 버려졌던 '황폐한 전답'을 옥토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대유둔은 첫해인 정조 19년(1795)에 1천500여섬의 소출을 올렸는데 이는 당시 최고의 생산성이었다.

대유둔은 조선 농촌이 나아가야 할 농경방식을 실천해보인 것이었다.

정조는 만석거와 대유둔의 성공에 힘입어 재위 22년(1798)에는 새로운 저수지 축만제(祝萬堤)를 쌓고 국영농장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했으며 황해도 봉산에도 장용영 둔전을 건설했다.

이는 조선 농업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길이었다.

정조는 모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는 풍족한 조선을 만들고 싶었고 이를 최고의 개혁으로 여겼다.

그러나 정조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정조는 재위 24년(1800) 자신의 개혁을 이어갈 새로운 체제를 만들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이는 그 자신의 비극일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의 비극이었다.

그의 사후 12살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 벽파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조선은 다시 성리학 유일사상 체제, 일당전제 체제로 회귀했다.

그러나 정조는 성공한 국왕이었다.

미래를 향한 비전, 개방적 세계관, 그리고 민생을 제일로 치는 생활개혁은 정조를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국왕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정조의 개혁은 우리 사회에도 큰 교훈을 준다.

그가 지향했던 미래지향적인 개혁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이었다.

우리 사회에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이다.

그러나 그 개혁은 정조처럼 미래를 지향하고 민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개혁이어야 할 것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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