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봄날은 가고

들판에는 지금 조용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겨울 풍설(風雪)과 봄의 변덕을 이겨내며 빈 들을 청청하게 지켜왔던 보리가 어느새 누르스름하게 바뀌어 농부의 낫질을 기다리고 있다.

풋풋한 청보리도 좋지만 이맘때의 보리밭은 각별한 정취로 우리 마음을 끈다.

황금빛에 살짝 분홍이 어린 묘한 빛깔, 꼿꼿한 허리의 그것들이 5월 훈풍에 일렁이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삶의 절정을 지난 소멸(消滅)의 미가 주는 연민 때문일까.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장면.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남자는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느냐며,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힘겨워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사랑도 변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벚꽃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옛사랑, 그러나 한때 그렇게도 자신을 힘들게 했던 애증의 파도가 어느새 고요히 가라앉은 것을 느끼며 담담히 돌아선 그는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한가운데서 바람결에 보리들이 부대끼는 소리를 녹음기에 담으며 잊었던 미소를 다시 떠올린다.

누구든 저마다의 삶에서 붙잡아두고 싶은 순간들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영원히 머무는 것은 결코 없음을, 그리고 사라진 것은 언제고 추억으로 되살아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들판 한쪽에선 모내기가 한창이다.

잦은 봄비 덕분에 못마다, 무논마다 물이 찰랑거리는 모습은 도연명(陶淵明)의 저 유명한 '사계절(四時)'의 한 구절, '봄물은 사방 연못마다 가득하다(春水滿四澤)'의 바로 그 풍경이다.

비어가는 보리밭과 다시금 채워지는 무논들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농가에선 연중 가장 중요하고도 바쁜 때. 이앙기로 심기 힘든 다랑논 같은 데서는 일일이 못줄을 띄우고 한줄 두줄 모를 심을 수밖에 없어 "아이구, 삭신이야" 소리가 노래처럼 튀어나온다.

된장에 풋고추일망정 논두렁에 퍽 퍼질고 앉아 먹는 들밥의 그 유별난 맛때문에 모내기철은 작은 축제같기도 했다.

요즘에사 새참 광주리 대신 오토바이로 배달된 자장면과 커피가 대신할 때도 많지만….

이제 곧 들판 곳곳에선 보릿대 태우는 연기가 오를 테고, 무논은 연둣빛 모들로 꽉 채워질 것이다.

그러면, 환장할 만큼 아름다운 이 봄날도 어디론가 홀연 사라지겠지.

전경옥 편집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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