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온 '추상미술 대부' 박서보

일흔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이고 있는 박서보(74) 화백이 4일 대구를 찾았다.

'한국추상미술의 대부', '한국 현대미술운동의 기수', '묘법이라는 단색회화의 전형을 창출한 작가' 등 온갖 수식어가 따라붙는 그의 모습은 젊은이보다 더한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까지 몸과 마음이 건강한데 나를 늙은이 취급하면 안되지. 게다가 화가란 작품 속에 온몸을 던지려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해요".

박 화백은 이미 알려진 대로 '손의 여행'으로 불리는 '묘법'(描法)의 창시자다.

그런 그의 상징적 명제인 '묘법'은 '무엇을 그리는가'가 아니라 '그리는 것' 자체의 방법적 모색으로 들린다.

그의 전매특허인 삼겹지(세 장의 한지를 겹쳐 만든 종이)를 최소 1주일에서 많게는 한달 동안 물에 담가놓는다.

그런 다음 젖은 삼겹지를 캔버스 위에 세 번 겹쳐 바르고 또다시 한지 조각을 붙인 후 붓으로 색깔을 입힌다.

스며든 안료의 수분이 채 가시기 전에 마지막 작업에 들어간다.

하루 14시간씩 보름 동안을 흑연으로 수천, 수만 번의 선을 긋고 또 그어 골을 세우고 작품을 완성한다.

그가 얘기하는 작업과정을 듣고 있으니 이건 예술이 아니라 엄청난 노동집약적 산물이자 극기의 과정이다.

그래서 박 화백도 자신의 작품을 '그린다'가 아닌 '제작한다'라고 표현한다.

"스님이 독경을 하며 목탁을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과정에서 자신을 비워내듯 연필을 긋는 반복적 행위에서 무심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박 화백은 또 "연필을 긋는 행위는 예전 선비들이 붓글씨를 쓰거나 사군자를 치는 끝없는 반복 속에서 자신을 가다듬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작품이 현대미술의 첨단을 달리면서도 한국적 미감에 가장 충실하다는 평을 받는 것은 아닐까.

그의 작품은 대개 비슷한 느낌이다.

작품을 뒤덮는 모노톤의 검정 및 흰 바탕에 반복적이고 대칭되게 세워져 있는 여러 골들은 한지가 물감을 흡수하듯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여기에 검정이나 흰색의 한가지 색으로만 작품 전체를 뒤덮은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박 화백 작품의 또 다른 묘미. 똑같은 흰색과 검정으로 보이지만 그가 생명을 불어넣듯 20여 가지 색상을 혼합해 만들어낸 박서보만의 '흰색'과 '검정'은 작품을 독특하고 매력적인 분위기로 포장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단색회화에만 심취했던 박 화백이 요즘엔 화려한 색깔에 맛을 들였단다.

나이가 들면 화려한 색이 좋아진다던데, 혹시 그래서일까. "2000년 일본에 갔다가 단풍의 오묘한 색채에 목욕을 하고 난 뒤, 왜 나는 그동안 이런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았을까 반성하게 됐지요. 앞으로는 놀라운 색채화가로 거듭날 생각입니다". 100세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창작의욕을 이어가겠다는 그가 다음엔 어떤 독특한 화풍을 가지고 나타날지 기대된다.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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