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에세이-그리스인 죠르바

비행기가 크레타 섬에 들어섰을 때 공항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니코스 카잔챠키스 에어포트.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대학 1학년 무렵이었다.

문학반의 선배들이 첫 번째 필독도서로 내민 두 권의 책 속에 김지하의 황토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죠르바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둘 모두 스무살의 나이와 썩 어울리는 책들이었다.

저항과 열정, 자유. 카잔차키스의 젊음은 터키와의 빨치산 운동에 바쳐졌다.

근대 그리스와 터키의 역사는 한국과 일본의 그것과 방불하다.

터키로부터의 독립운동에 헌신한 뒤 그가 써낸 작품이 바로 그리스인 죠르바였다.

죠르바. 열정과 꿈, 자유분방함을 생의 의미로 파악했던 그는 어떤 그리스인보다도 더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내였다.

그의 삶은 크레타에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과 바람, 잉크빛으로 부서지는 파도들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술과 여행, 여인의 숨결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곳이야말로 내가 사랑할 천국이 아닌가. 유신과 독재의 시절, 죠르바의 삶은 김지하의 황토가 읊조리는 또 다른 지평에서 이 땅이 우리가 진실로 사랑해야만 하는 땅임을 열정적으로 일러주었던 것이다.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낡고 낡은 그 책을 밤새워 거듭 읽으며 언젠가 꼭 죠르바의 땅, 크레타에 가리라 마음먹었다.

삼십년의 시간이 흐른 뒤, 지금 눈앞에 그 땅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뒷좌석에 배낭과 카메라 가방을 놓으며 택시 기사에게 물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아는가. 물론이고말고. 털북숭이인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켰다.

오, 그 순간의 감동이라니. 그의 심장과 지혜의 영역 안에 카잔챠키스의 삶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그는 간명한 손짓 하나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달리고 있는 길의 이름이 카잔차키스 로드라는 것도 껄껄 웃으며 일러 주었다.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내가 예상한 액수의 3배를 요구했지만 나는 기꺼이 응했다.

약간의 불량함 속에 스며 있는 열정의 끼. 그의 모습 속에서 죠르바의 모습을 읽은 때문이었다.

크레타에서 보낸 시간들은 행복했다.

역사박물관의 15호실에서 나는 그가 평소에 썼던 안경과 책상, 책장 속의 책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누웠던 작은 침대. 그리스의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그의 이력에 맞지 않게 침대는 한 몸을 누이기에도 불편할 만큼 작고, 좁고, 낡았다.

누추함 속으로 번지는 영혼의 맑음과 자유.

베니젤루 광장의 기념관에서는 때마침 카잔차키스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희랍인 죠르바의 초판본을 비롯한 그가 생애에 펼쳐낸 책들을 모조리 보는 행운을 누렸다.

종이 위에 문자로 기록된 이 작은 물건들이야말로 인간이 사랑하고 싸우고 아파한 그 무엇보다 따뜻한 삶의 기록들이 아니겠는가.

시가지의 제일 높은 언덕에 자리한 그의 묘 곁에서 나는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한나절을 보냈다.

40도가 넘는 대기 속에서 두 발로 열불을 내며 이틀을 걸어다닌 탓으로 이틀 동안 여관 방 안에 끙끙 앓아누워 있어야 했지만 나는 내 머리와 가슴 안에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과 바람과 파도의 꽃들이 술렁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속에서 나는 몇 번씩 그의 묘비명을 떠올리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는 까다로웠던 사람.

자신의 꿈과 열정, 진실한 삶의 의미를 위해 한없이 기다리고, 두려워하고, 까다로웠을 그의 영혼을 생각하니 마음 안이 저려오다가 어느 순간 한없이 평화로워지는 것이었다.

자신이 지닌 척박하고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들을 진실로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생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그리스인 죠르바의 의미가 아니겠는가.(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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