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의 일입니다.
수습기자 시절, 난생 처음으로 법원에서 재판을 지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개정중'이라는 팻말을 보고 법정 한 곳에 들어갔는데 절도 피의자가 재판을 받고 있었지요.
잠시 후 검사가 조용하게 일어나 단 한마디만 하고는 자리에 털썩 앉았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지 않았더라면 '징역 3년'이라고 구형하는 말을 놓칠 뻔했지요.
곧바로 변호사가 일어나 변론을 하는데 1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몇마디를 했는데 반쯤은 들리고 반쯤은 들리지도 않았지요.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니 선처를 바란다'는, 틀에 박힌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기자는 내심 적잖게 흥분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결정짓는 일인데 저렇게 무성의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지요. TV에서 보아온 미국 법정의 열띤 공방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변호사가 정성껏 변론을 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법원을 출입하는 요즘, 그 당시를 생각하면 혼자 빙긋이 웃음을 짓게 됩니다.
몰라도 한참을 몰랐던 것이지요. 피의자와 변호사가 모두 혐의를 인정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말이나 행동은 불필요했던 것이지요.
법조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수들끼리 무슨…"
판사와 검사, 변호사 사이에 정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말을 더해 봤자 사족에 불과하다는 의미이겠지요. '구두변론'을 원칙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서면주의'를 더 중시하는 재판 시스템 때문입니다.
판사들은 말보다는 변호사가 제출한 변론요지서를 꼼꼼하게 챙겨보면서 판결문을 쓰는 게 보통이지요. 재판기록에도 신문과정은 모두 기록되지만, 변론은 단 한마디도 기록되지 않는 게 관례랍니다.
한 변호사의 얘기입니다.
"무죄를 다투거나 특별한 사건이 아닌데도, 장황하고 유려하게 변론을 하는 것은 다분히 의뢰인을 의식한 제스처일 수 있지요."
그래서인지 변호사들은 예상 밖으로 보통 사람들보다 언변이 썩 뛰어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변호인석에 마이크가 설치돼 있어도 방청석에서는 여전히 잘 들리지 않습니다.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당수 변호사들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짧게 변론을 하기 때문이지요.
요즘 사법개혁 과제로 배심제, 참심제 도입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검사와 변호사는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를 상대로 유무죄를 입증해야 하지요. 이렇게 되면 언변과 제스처가 뛰어난 사람이 능력있는 법률가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법정의 풍경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해지네요.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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