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이상 바다를 항해해온 노련한 선장이라도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큰 파도를 보면 두려움에 떨 듯이 오래동안 기업을 경영해 온 사람들도 전에 없이 어려운 경제 상황을 맞아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있다.
기업이 투자를 꺼리고 내수 회복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는 등 국내 경제를 둘러싸고 있는 암울한 공기가 걷히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은행 기업지점장과 기업체 관계자 등 기업 현장에서 느끼는 이들의 체감 경기는 훨씬 심각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들을 하고 있다.
자동차 부품업체인 세원정공의 김상철 부장은 "자동차부품업이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국내에서 실적을 내며 버티고 있지만 국내 자동차 신규 수요가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짧게는 5년, 길게는 8년을 버티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부품업체도 완성차 업체의 해외 공장 설립에 따라 해외에 진출, 인건비 절감과 해외 판로 개척에 나서야 하며 이미 평화, 화신, 삼립산업 등이 그렇게 하고 있는 점을 거론했다.
그는 세원정공도 슬로바키아에 공장을 설립한 기아자동차를 따라 슬로바키아에 부품공장을 설립하는 방안과 중국에 진출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세원정공은 다른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괜찮은 자동차부품업체이지만 차후에 투자를 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는 투자를 꺼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상황을 보며 때를 기다리겠다는 자세인 것이다.
기업은행 대구경북영업본부 박충대 기업대출 담당 심사역은 업종에 관계없이 투자를 꺼리는 현 분위기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
박 심사역은 "올들어 기업대출 실적을 보면 최악의 상황에 빠져있는 섬유에서부터 비교적 괜찮다는 자동차부품업종에 이르기까지 신규 시설투자를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형편"이라며 "그나마 구미 지역의 핸드폰, LCD 관련업체 등 IT 분야에서 시설 투자가 있는 정도"라고 말했다.
기업은행 대구경북영업본부의 최근 3년간 기업대출 실적을 보면 2002년 12월말에는 전체 3조8천126억원 중 운전자금은 2조9천213억원인 반면 시설자금은 8천913억원에 그쳤다.
지난해 말에도 전체 4조1천373억원 중 운전자금은 3조2천731억원, 시설자금은 8천642억원이었고 지난달 말에는 전체 4조4천677억원 중 운전자금은 3조5천325억원, 시설자금은 9천352억원으로 운전자금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박 심사역은 김 부장이 지적 했듯이 자동차부품업체의 경우 국내 자동차 신규 수요가 활발치 않고 앞으로 5년 정도 주기의 차량 교체 수요에 주로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내 자동차부품업체는 과잉 상태에 접어들었다며 겉으로 나타나는 실적과 달리 업계 내부는 심각한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올 상반기 대구은행내에서 기업대출 실적 1위를 차지한 조성문 기업영업지점장도 기업 대출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장래성있는 기업들이 시설에 투자하고 실적이 좋아지면 다시 시설을 확장하는 형태로 경제가 발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3공단과 검단공단내 소규모업체이지만 장래성이 밝은 기업들을 적극 발굴, 대출을 이끌어냈다.
그는 3공단내 도금업체인 윤금사와 검단공단내 사출성형업체인 신우정밀이 공장을 확장하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그는 "장래성이 있는 업체들을 꽤 많이 발굴할 수 있었지만 그들 상당수는 투자를 꺼린다"며 "신규 투자에 나선 기업들도 망설임 끝에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구은행의 기업대출금 자료도 이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대구은행은 2002년 말 기준 전체 기업대출금 5조1천4억원중 운전자금이 3조9천억원, 시설자금이 1조1천596억원이었고 지난해 말은 전체 5조8천685억원 중 운전자금 4조4천772억원, 시설자금 1조3천913억원, 올들어 지난 6월말에는 전체 6조2천241억원 중 운전자금 4조7천498억원, 시설자금이 1조4천743억원이었다.
전체 대출금 규모는 늘어나고 있지만 시설자금 비중은 늘어나지 않고 있다.
기계설비업체인 (주)성림도 투자를 꺼리고 있다.
성림은 최근 경기가 살아나고 있는 일본 업체의 수요에 의해 제품을 생산하고 있지만 국내 업체들이 설비 투자를 꺼리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기업 운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성림의 김창환 이사는 "현재 대구와 구미에 공장이 있으며 대구에 공장 증설의 필요성이 있지만 경기 상황이 불투명해 보류하고 있다"며 "대구와 경북지역, 나아가 국내 어느 곳의 업체에 가서 물어보더라도 거의 모두 똑같은 말을 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의 총자산에서 외부자금의 비중을 나타내는 차입금 의존도가 외환위기 이후 6년 연속 감소했다는 통계도 이같은 현실을 나타내고 있다.
10일 산업은행이 연간 매출액 10억원 이상의 국내 제조업체 2천526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작년 이들 기업의 총자산은 585조5천억원이었고 차입금은 150조4천억원으로 차입금 의존도(차입금/총자산×100)는 25.7%였다.
이는 산업은행이 제조업체의 차입금 의존도 조사를 시작한 지난 1977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로 일본의 30.8%(2002년)보다 훨씬 낮고 직접금융시장이 우리보다 훨씬 발달한 미국의 25.4%(2003년)와 비슷한 수준이다.
제조업체의 차입금 의존도는 외환위기가 발생했던 1997년에 54.8%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1998년 50.1%, 1999년 38.3%, 2000년 36.9%, 2001년 34.4%, 2002년 28.9%에 이어 작년까지 6년 연속 줄어들고 있다.
제조업체의 차입금 규모는 1997년 317조원에서 1998년 313조2천억원, 1999년 234조9천억원, 2000년 209조원, 2001년 187조4천억원, 2002년 157조7천억원, 2003년 150조4천억원 등으로 매년 감소하고 있다.
차입금 의존도의 감소는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건실해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한편으로 재무 안정성에 치중한 나머지 투자는 등한시하고 있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성림의 김 이사는 경기가 침체돼 있고 전망이 불투명한 것도 문제이지만 대기업과 협력업체간 주-종 관계의 왜곡된 구조적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했다.
현재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납품 단가를 낮추거나 협력업체 직원들의 복리후생 희생을 강요하는 등 중소기업을 짜내 성장했다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중소기업체 사원의 급여는 대기업체의 60% 수준에 불과하며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의 생계 문제도 심각하다고 언급했다.
그는 "최근 '귀족 노조줁 이야기도 나오는데 협력업체 직원이 대기업을 방문, 대기업 직원들이 편하게 일하면서 고생하는 협력업체 직원들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받는 것을 보면 심한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경제의 부정적인 특징으로 두드러지는 '양극화' 측면에서 기업의 양극화를 개선하기 위해 대기업의 횡포를 줄이는 제도와 관행의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기업들은 국내 정치적 상황과 국제 지정학적 요인도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정부 정책이 뚜렷하지 않고 장래 비전이 없는 상황이 야기하는 심리적인 위축 현상이 경기 상황 못지 않게 기업을 움츠리게 하고 있다.
국민소득 1만달러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분배를 중시한다든지, 가진 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키우는 상황에서 기업가들에게 투자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세원정공 김상철 부장은 "젊은 기업인들이라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겠지만 이것도 경제 상황이 예측 가능할 때의 이야기"라며 "50대 이상의 기업주들은 안정성을 추구하는 측면이 있는데 기업가들을 부정적으로 보고 경제 상황도 불투명하다면 누가 선뜻 투자를 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성림의 김창환 이사는 "국민소득 1만달러인 상황에서 분배를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기업주는 종업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기업가들이 우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경제 정책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얼마전 정부 관료가 '부자들이 돈을 써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이 한 것과 관련, 지역의 일부 기업가들은 "그는 머리가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다"며 "그런 말을 하기 보다 기업가들이 투자하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 그가 해야할 일인데 기업가들을 위축시키는 말만 하니..."라는 냉소적 분위기가 나돌기도 했다.
최근 국내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외국 분석기관들이 국내 경기의 심각성이 필요 이상으로 과장돼 있다고 지적했듯이 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정치적 갈등들의 이면에는 정쟁적 의도가 깔려있는 점을 배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 경제적인 상황들로 인해 기업인들이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돼 투자를 꺼리고 있으며 '투자 유보줁가 국내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점만은 분명하다.
기업인들은 경제 전망이 좀 더 예측 가능하고 희망을 지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김지석기자 jise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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