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부모님께서 성실하게 가꾸어온 가정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컴퓨터와 영어를 접할 수 있었고,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기에 여러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다음 달부터 시작되는 수시2학기 모집 원서 접수를 앞두고 수험생들이 진땀을 빼고 있다.
특별한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소개서, 학업 계획서, 추천서 등 필요한 서류를 만드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수험생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 자기 소개서다.
얼핏 생각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남에게 소개하는 글'만큼 쓰기 쉬운 것도 없는데 뭐가 그리 어려우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자기 소개서를 쓰기 위해 갖가지 수험서를 사 보고, 학원을 찾아가고, 한 장 대신 써 주는데 100만원이니 200만원이니 하는 게 현실이다.
대학입시라면 비용을 아끼지 않는 학부모들의 과열을 탓하자는 게 아니다.
진정 염려스러운 건 자기 존재의 의미나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볼 기회를 주지 않는 학교 교육 시스템이다.
초.중.고 12년을 교육받고서도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른다는 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기자의 기억으로 우리말 가운데 처음 배운 것이 '나, 너, 우리'이고 영어로 처음 배운 것이 'I am Tom. I am a student."이다.
'나'라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었는데, 정작 그 뒤로는 내가 누구이고, 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운 기억이 거의 없다.
막상 대학에 진학해서 혼란스런 시대의 한가운데에 놓이고 나서야 스스로의 정체성을 되물으며 '나는 왜 이리 늦터진 걸까' 가슴을 치곤 했다.
20년 넘게 지난 요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학생들은 여전히 자신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여건도 없다.
달라졌다면 자기를 소개하는 데 필요한 요건이 성장과정과 가정환경, 품성이나 인성, 가치관을 형성한 계기, 특별한 취미와 특기 등이라고 여긴다는 것뿐이다.
사실은 이게 더 문제일지 모른다.
수험서에 나온 자기 소개서 작성법이나 틀에 박힌 모범답안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문득 이인화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서 울리던 외침이 떠올라 낡은 책장을 뒤적거렸다.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자는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가꾸며, 쓸데없는 일과 무용한 생각을 거절할 줄 안다.
그러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 우리의 존재는 한갓된 우연성에 바쳐진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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