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궁(國弓), 활(弓)을 얘기하자면 예천을 빼놓을 수 없다.
활 쏘는 민족의 기(氣)와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켜오는 고장이기 때문이다.
그 구심에는 국내 최고의 궁장(弓匠)이자 명무(名武)인 권영학(權寧鶴· 62·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6호 예천궁장)씨와 그가 만들어내는 활이 있다.
▨신궁 명장
활과 함께한 40년 외길 인생. 그 길을 걷게 된 것은 운명처럼 이끌렸고 수양의 도(道)를 깨우치게 했던 우리 활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었다.
권씨의 고향은 예천읍 왕신리 '왕산골'. 소년시절 그는 활 제작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아버지로부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약조를 강요받았다.
당시만 해도 빛을 보지 못하던 장인의 길 대신 관직으로 입신할 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호통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활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거역할 수 없는 '핏줄'이었다.
아버지가 활 만드는 일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던 터라 대신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활이라도 원없이 쏘아 볼 요량으로 궁도부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대물림은 궁사의 자질로 나타났다.
한눈에 명궁의 재목임을 알아 본 지도교사가 부친을 설득해 손수 만든 활을 건네게 했고 권씨는 그 활로 신기의 활솜씨를 보였다.
38세되던 해 전주대사습놀이 국궁대회에서 장원에 올라 가장 젊은 나이에 '명무(名武)' 라는 칭호를 얻은 것을 비롯해 전국대회 100여회 입상에 우승만 48회를 했다.
그런 와중에도 궁장의 길은 여전히 가로막혀 있었다.
아버지의 채근으로 상경해 대학 재학 중 총무처 4급 공채에 합격, 뜻하지 않은 외도를 했으나 1964년 6·3학생운동에 참가한 대가로 학교와 직장을 모두 잃었다.
전화위복이었다.
어쩔 수 없었던 낙향이 비로소 궁장의 길을 터준 것이다.
아버지가 바라는 길을 거스른데 백배사죄한 다음에야 활 제작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기법을 기본으로 했지만 감히 변형을 시도했다.
활폭을 줄이고 탄력성과 미려함을 더하는 작업이었다.
아버지의 호통이 따랐으나 활을 직접 쏘면서 개선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신기일까? 1967년 선보인 첫 작품 13장은 내로라 하는 궁사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그 순간부터 이미 권씨는 최고의 궁장이었다.
권씨의 활 제작 솜씨는 예술의 경지에 비했다.
궁사들은 소장하려 애썼고 국내는 물론 외국 유명 박물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우리 활의 위상을 높였다.
1980년 경북무형문화재 지정은 오히려 때늦은 것이었다.
▨예천 활
우리활은 목궁, 철궁 등 약 10종류가 있었는데 지금은 소뿔로 만드는 각궁만 남았다.
권씨의 예천 활도 각궁이며, 길이로는 단궁(短弓), 구조상으로는 목편과 죽편, 각편 등을 모두 사용해 만드는 복합궁이다.
주재료는 대나무, 산뽕나무, 물소뿔, 소힘줄, 민어부레 등 모두 천연소재다.
습하지 않은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만들며 활 한장 만드는데 300번 이상 손이 가야하는 정성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1920년쯤 안동권씨 집성촌인 예천 '왕산골' 에 활 만드는 기술을 가진 외지사람이 들어와 권씨의 조부대에 제작술을 전했고 다수의 마을사람들도 따라 배웠다.
예천 활이 전국수요의 80%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타지의 활제작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산, 경주, 광주 등지에도 궁장이 있지만 이 역시 '왕산골' 출신이다.
▨궁장의 소임
"인정 받는 궁장의 지위에 올랐지만 오히려 짐스럽습니다.
"
권씨는 "고급 스포츠레저와 양궁에 의한 국궁의 급속한 퇴조현상이 자신의 힘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자괴감을 느낀다" 고 말했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을 작정이다.
무엇보다도 궁장의 맥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할 계획이다.
권씨는 정부의 궁장후보들에 대한 육성 지원과 국민들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했다.
그렇지 못하면 저변확대는 고사하고 우리 활의 명맥도 단절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런 우려 때문에 요즘은 우리 활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책을 출간하는데 몰두한다.
꼬박 10년이 걸린 작업이다.
또 맏아들에게는 국궁 제작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했다.
궁장으로서의 소임이라는 것이다.
예천·정경구기자 jkgo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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