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신문사설-"침략징후 없다" 보고, 통신사 김성일 역적인가

임진년 왜란이 발생하고 부산진과 동래성이 함락되자 조정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성일을 잡아들였다.

왜란 전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왔던 그는 "왜의 조선 침략 징후는 없다"고 보고했고, 이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조정은 오늘 우리가 일본군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게 된 책임을 김성일에게 묻고 있다.

조선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한 책임이 김성일에게 있는가.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의견은 달랐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고 김성일은 침략 가능성을 부인했다.

조정이 김성일에게 책임을 묻는 근거다.

그러나 당시 이들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던 서장관 허성과 종사관 황진 역시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밝힌 바 있다.

김성일은 어째서 다른 의견을 냈을까. 일부에서 주장하듯 단순히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이었고 동인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일까.(김성일은 동인이고 황윤길은 서인이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김성일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왜의 무장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무장이 곧 침공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왜의 침공설이 힘을 얻으면, 전쟁준비로 이어져야 했고, 무리한 징발은 민란을 부를 수 있었다"고 밝혔다.

통신사들이 돌아온 1591년 국내외 정세는 어땠는가. 북방 여진족의 소요가 심했다.

크고 작은 전투가 잦았고 민심이 흉흉했다.

형체도 없는 반란 음모자 길삼봉을 찾아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사람을 붙잡아 죽였다.

열 몇 살을 겨우 넘긴 소년이 붙잡혀 와 죽었고, 고문을 이기지 못한 사람이 이웃을 고발하고 죽었다.

고발당한 이웃은 잡혀와 또 다른 이웃을 고발하고 죽었다.

길삼봉을 보았다는 사람이 길삼봉으로 몰려 죽었다.

길삼봉이 누구냐고 물었던 사람 역시 죽임을 당했다.

길삼봉을 욕했던 사람이 붙잡혀 와 죽었고, 그의 시신을 거두어 준 사람 역시 죽임을 당했다.

정여립의 모반음모 사건은 흉흉한 민심의 정점이었다.

통신사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그럼에도 김성일이 속한 동인은 물론이고 임금 역시 전쟁 가능성을 외면했다.

임금과 조정은 황윤길의 보고뿐만 아니라 앞서 이율곡의 10만 양병설 역시 외면했다.

전쟁 가능성을 인정할 경우 전쟁준비에 돌입해야 한다.

정병을 모으고, 그들을 입히고 먹이기 위해 군량을 더 걷어야 한다.

성을 쌓고 도로를 내기 위해 부역 징발을 늘려야 한다.

조정과 김성일의 민란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책임은 김성일이 아니라 임금과 조정에 있다.

민란을 우려해 전쟁준비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든 조정의 책임이다.

의병을 지원하고 왜적에 맞서 싸웠던 김성일은 죽기 전 "전쟁이 발발했고 나와 조정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틀렸다.

그러나 전쟁 가능성이 99%이더라도 나머지 1%에 미련을 둘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조선이 직면한 문제였고 풀어야 할 숙제였다"라고 밝혔다.

그의 변명이 아니더라도 왜란초기 잇따른 패배의 책임은 김성일이 아니라 임금과 조정의 몫이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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