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문화전쟁', 갈등만 키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연극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가끔 자신이 직접 배우가 돼 무대에 오르곤 했는데 어느날 프린(Prynn)이란 작가가 시원찮은 아마추어 연기에 대해 비판하자 감히 여왕이 출연한 연극을 비방한 것은 곧 여왕을 모독한 것이란 이유로 귀를 자르고 종신형에다 1만 파운드의 벌금을 물렸다.

국왕과 귀족.행정관을 비방하는 것은 비록 그 비방과 풍자 내용이 사실이더라도 명예훼손으로 처벌 했던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시절의 일화다.

일주일전 한나라당 국회의원 몇몇이 모여 창단했다는 극단 '여의도'의 연극이 노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방.풍자했다며 여당이 발끈하는 파문이 있었다.

아무리 연극이라지만 국가원수를 저속한 성(性)적 표현이나 욕설로 풍자한 것은 표현의 자유를 의도적으로 남용한 것 아니냐는 것이 여당측 반응이었고 야당쪽은 '연극은 연극일뿐'이라고 응수했다.

풍자연극 내용과 극중대사가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기에 엘리자베스 1세 시절도 아닌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하릴없는 정쟁거리가 됐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거기다 언론에서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다보니 풍자극의 대사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상생을 다짐했던 여.야가 드디어 문화장르까지 정치 투쟁에 이용하는 일종의 '문화전쟁'을 시작한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갖게 된다.

우선 시비가 된 풍자극이 표현의 자유를 벗어나지 않은 그야말로 '연극일뿐'인지 아니면 정치적 의도를 품고 연극 무대를 빌려 악의적 폄훼를 노렸던 정치극인지는 정치권에 미뤄두고 논란거리가 됐다는 토막 대사만 몇군데 옮겨보자.

노가리:이게 우리 집안 꼴이오. 계급장 다 떼고 위 아래도 없고... 빌어먹을 집터(서울) 탓이오. 집터가 안좋아서(수도이전 풍자) 일도 안풀리니 집에 톱질하는 것이지. 집이 좀 휘어야 마누라가(박근애) 내말 듣고 따라 오지. 이게 다 고단수 전략이야 난 한다면 하는 놈이야.

저승사자:이놈 심보 놀부보다 더 한 놈이네. 이사를 가려면 가족들하고 모여서 상의를 하는 게 순서 아닌가. 전문가를 불러!

뻔데기(노가리 친구):이사 가는거 민생이 (노가리 아들.민심 상징)는 어떻게 생각하냐. (노가리가 반대한다고 하자) 동지 아니면 다 적이야. 우리말 안듣는 놈들 다 우리 적이라고 다 죽여야 돼. 너 명심해.

노가리:듣고 보니 가슴을 울리는 말이네.

깍뚜기(노가리 친구):(뻔데기에게) 너네 대학 총장 선거 언제야.

너 출마하지 내가 뒤 봐줄게. 경쟁자가 나오면 명단만 보내. 누구든지 할아버지 아버지 뒤를 캐면 걸리는게 나오거든. 아마 단군할아버지도 뒤캐면 뭔가 나올걸.

노가리:청승 그만 떨고 빨리가자. 붙잡는다고 경제가 사나. 경제(노가리의 죽어있는 아들) 퍼뜩 보내고 이삿짐 싸자. 여기는 (서울) 불길해서 터가 안좋아. 더 이상 못산다.

저승사자:에이 미친놈. 경제 살려주고 저 썩을 놈의 아버지 데려가야겠다.

(객석을 향해) 여러분 경제를 데려가는게 낫겠소 아니면 저 썩을 놈의 아버지 노가리를 데려가는게 낫겠소.

박근애:저 사람(남편 노가리) 입이 거칠어 막말하고 가볍게 처신 합니다만 우리 민생이 애비 없는 자식 만들수는 없잖습니까. 차라리 나를 데려가 주세요.

저승사자:(노가리에게) 지새끼(경제) 죽은 줄 모르고 춤추는 등신 같은 놈아. 앞으로 3년간 허튼짓 하지 말고 제발 입조심 하고 똑바로 하거라....

연극무대의 풍자극이라고 둘러대면 할말 없겠지만 대사를 살피건대 여당이나 청와대 입장에선 심기가 편할 순 없겠다.

일부 표현이 지나쳐 보이는 것도 적절치 않지만 이런 시비가 확산돼 정치권에 문화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더더욱 바람직 하지 않다.

미국의 부시 정권을 간접 비방한 영화 '화씨 9.11'도 문화 장르를 이용한 일종의 정치 선동 공세라 볼 수 있다.

우리 정치권에도 이미 이번 풍자극뿐 아니라 과거사 시비를 놓고도 여.야간에 소리소문없이 상호 공격용 다큐멘터리 영화를 이용한 문화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다.

어느 보수 인터넷 쪽에서 제작중이라는 영화는 노 대통령 장인과 관련 인민재판을 받았다는 의혹과 관련해 피해 유족들을 출연시켜 당시 상황등을 영화로 제작, 공개 시사회를 할 예정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반대로 진보 진영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시대와 친일파들의 피해를 다룬 영화가 곧 나올거란 소문도 나돌고 있다.

연극이든 영화든 과연 이런 문화전쟁 행태의 대응들이 문화예술 장르의 순수성을 악용한다는 논란을 떠나 경제 외교안보 등 갈수록 절박해져가는 나라형편으로 볼때 부질없는 소모적 분열이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예술을 정쟁에 이용하는 '문화전쟁'은 어느쪽 승자도 없이 갈등만 키울뿐이다.

김정길(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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