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우리 동네에서 가장 먼저 단풍드는 나무가 있다.
TV뉴스에서 금강산이다, 설악산이다, 명산에 단풍든다는 소식이 있으면, 그 소식이 제 이야기인 듯 성급하게 물들어 버리는 단풍나무.
어떤 해는 너무 이르다 싶게 물들어, 가을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이들에겐 너무 싱거워 보이는 단풍나무. 한 해도 거스르지 않고, 나무는 제가 물들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
마치 이웃 나무들에게 경쟁심이라도 생긴 듯, 조금은 성급하게.
나무 한 그루의 존재를 우리는 어느 정도의 가치로 바라볼까. 나무가 내뿜는 산소나, 그늘, 혹은 나무가 내려주는 열매의 양으로 나무의 가치를 따지는 게 고작 아닐까. 집 앞 나무 한 그루가 사계절동안 변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마음의 일부가 나무에게 가까이 다가갔거나, 혹은 나무의 마음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의 마음이 그걸 알아차리기는 했을까. 그 알아차림, 나와 나무의 친화력은 어느 정도의 가치로 말할 수 있을까.
나무가 갈아입은 옷은 때깔 고운 한복을 차려 입었다고 할까. 한 바탕 뜀박질에 열이 오른 아이들 볼때기에 비친 붉은 기운이라 할까. 어머니 오랜만에 하는 외출에 설레는 마음으로 바른 두터운 화장이라고 할까. 술기운 거나하게 올라 입가에 번져나는 노랫가락의 여운이라 할까. 성당의 단풍나무는 그렇게 들판을 향해 서서 길가는 이들의 허리를 한번씩 펴게 한다.
나는 해마다 가을이면 이 나무 아래서 한참을 서성거린다.
약간은 쑥스럽고, 약간은 기쁜 마음으로. 또 어디 먼 곳에 가지 않고 즐겨보려는 가을 소풍 온 심정으로 나무 아래를 서성거려보지만 그 때마다 내 어깨는 가을볕이 비추다 떠나는 외딴 벽처럼, 벽의 모서리처럼, 어깨며 등이 시려 옴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무어라 대답할 수 없는 것은, 가을 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올해는 나무 한 그루 바라보는 일이 무척 힘이 든다.
나무 한 그루가, 가을을 받아 내는 것을 보면서 함부로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음은 무엇인가. 단풍든 나무에게 아름다움에 마냥 감탄사를 남발하기엔 어딘가 부끄럽고, 어딘가 어리석음이 묻어 있다.
함부로 물든 나무 아래서 감탄사를 터트릴 수 없는 심정. 머리 들어 나무를 바라보는 동안 사람의 마음에도 그런 순간이 잠시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것을 무어라 또 답하기가 힘이 들지만, 나는 그것을 어떤 반성이나, 혹은 어떤 황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쏟아내는 말장난 같이 새떼들 지나가고, 그 때마다 잎들은 새떼들을 따라 선선히 땅으로 내려온다.
가을은 바로 이러하다.
땅으로 모두 내려온다는 것. 땅으로 내려와 둥글고 환하게 굴러다니는 것.
그것은 지상으로 내려온 어떤 후광 같은 것. 그 후광으로 사람들의 몸도 환해지고, 사람들의 얼굴도 환해지는 것. 우리 사는 동안 이렇듯 황홀한 날들 몇 번이나 있을까. 이렇듯 황홀하게 아파 보기라도 하는 날은 몇 날이나 있을까.
힘없이 전화 받는 친구의 낮은 목소리처럼 이파리 떨어지고 나무는 조금씩 남루해진다.
가지가 앙상히 드러날 때마다 하늘은 차가워진다.
잎잎에 생기 발랄한 기운이 그득할 땐 하늘도 푸르고 싱싱했지만, 한 잎 한 잎이 무너져 내릴 때의 하늘은 발 담그기 싫은 세숫대야의 찬물처럼 시리고 아프다.
나비도 이젠 날개를 거두었다.
노란 국화도 시득 시득 시들어가고, 떨어져 으깨진 홍시도 말라 시멘트 바닥에 들러붙어 빠닥 빠닥 말라간다.
세상이 통째 어딘 가로 이사를 가는 듯 부산한 움직임 소리 그치질 않는다.
공중과 지상에서 온통 나뭇잎들 무너져 내리고 어딘가로 쓸려 가는 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이럴 때 사람은 한번쯤 미쳐도 된다.
정말로 한번은 미쳐도 되지 않을까. 가을 물이 든 마음으로 정말 한번 미쳐서 가을의 한 가운데 있어보는 것. 무어라 딱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번 미친 듯이 어느 거리를 서성거리는 것이다.
김정용(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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