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결혼한 젊은 남자치고 밥하고 설거지, 청소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결혼해서 아내가 해주는 따끈한 밥 얻어 먹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요."
지난 5월 결혼한 직장인 김태환(31·대구시 대명동)씨는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신세 타령이 늘어진다.
밥하고 설거지하는 남자 신세가 말이 아니라고…. 가사 분담 등을 두고 한동안 아내와 신경전을 벌였던 김씨는 이내 두 손을 들어 버렸다고 한다.
맞벌이하는 처지에 옛날 아버지 세대처럼 '남자'랍시고 폼 잡고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볼멘소리를 하는 젊은 남성들도 스스로 남녀평등주의자임을 자랑스레 내세우는 성병조(52·㈜코끼리푸드 관리부장)씨를 만난다면 할 말을 못할 듯하다.
'아내를 하늘같이 섬기며 집안 일을 가리지 않는 남자.' 여성신문사의 평등 부부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아내의 행복은 남편 하기 나름'이라고 뭇 남성들에게 얘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대구시 범물동 집에서 그와 아내 송옥순(49·명덕초교 교사)씨를 만났다.
큰 꾸밈없는 집안에서 유독 벽에 걸린 그림들이 돋보였다.
"모두 아내가 그린 그림들입니다.
일요화가회에 소속돼 일요일마다 그림 그리러 열심히 나갔어요. 연합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아내 자랑이 시작됐다.
"아내는 올해 대구로 들어오기 전까지 경산, 영천, 칠곡 등 경북에서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연년생인 두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싶어 결혼할 때부터 아내를 적극 돕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성씨는 바쁜 와중에도 아내가 야간 공부를 하며 석사 학위를 따고 미술, 상담심리 공부 등도 할 수 있도록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아 생활했다고 한다.
부모나 아이나 먼저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밥하고 청소하는 일이 일상화돼 있다는 이야기다.
군 제대 후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큰 아들 상민(23), 미국에서 어학연수 중인 딸 은주(22) 남매를 모두 타지로 보내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 부부의 생활은 요즘 어떨까.
새벽 4시. 성씨가 일어나는 시간이다.
그는 아내가 깰까봐 조심하면서 혼자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고 자신과 아내의 차 2대를 세차한다.
여성이 운전하는 차가 지저분하면 곤란하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곤 집에 들어와 1시간 정도 신문을 본다.
6시가 되면 아침밥을 짓고 회사에 갈 준비를 한다.
그는 출근을 하면서 휴대전화로 아내를 깨운다.
아내가 일어나는 시간은 7시가 조금 지나서다.
"저는 밤 11시쯤 되면 자지만 아내는 자정이나 새벽 1시쯤 잡니다.
부부가 서로 스타일이 다를 수 있으니 인정할 건 인정해 줘야지요."
저녁 설거지는 성씨의 몫이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가 하면 10분 이상 걸릴 것도 자신이 하면 1, 2분 만에 끝낼 수 있다고 말한다
1주일에 한 번 하는 청소도 그의 차지다.
진공청소기를 돌릴 때 몸체를 들고 해야 손쉽다고 말하는 그는 걸레질을 할 땐 발로 밀어야 운동도 된다고 말한다.
"결혼할 때 세탁기는 아예 안 샀습니다.
세탁기를 구입하는데 돈도 들어가지만 빨래는 제가 책임지고 해주겠다는 생각에서였죠."
성씨는 큰 대야에 세제를 풀어 발로 지근지근 밟아야 빨래 때가 잘 빠진다고 한다.
빨래하는 아버지를 보고 아이들도 맨발로 빨래하는 걸 많이 도왔단다.
지금은 세탁기로 빨지만 빨래를 널고 개는 것은 그가 한다.
"제가 빨래를 갠 것과 아내가 한 것은 금방 표가 납니다.
군대 시절 각을 잘 세우는 것이 몸에 배서요."
그는 일요일에 여유가 있을 때 아내 구두도 직접 닦는다.
아내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집안이나 밖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직접 찾아 할 수 있는 일을 도맡아 하는 셈이다.
이런 그를 보고 아내 송씨는 "더 많이 하는 남편들도 많다"며 당연시한다.
약간은 무심한 듯 한 아내가 "더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칭찬을 듬뿍 해줬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기도 하다.
결혼 초부터 서로 경칭을 쓰는 이 부부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조력자가 되면 중년의 위기는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교사로 일하며 공부와 취미활동에 열심인 아내, 직장생활을 하며 지난해 수필가로 등단해 틈날 때마다 글을 쓰는 성씨. 일요일이면 함께 산에 다니고 손을 꼭 잡고서 집 부근 공원을 산책하는 이들 부부는 "내년 결혼 25주년에는 금강산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라며 "큰 욕심 안 부리고 평범하면서 아기자기하게 사는 게 행복이지 않겠느냐"며 웃음짓는다.
50이 넘은 남자가 이런 얘기를 신문에 내도 괜찮겠느냐고 묻는 기자의 걱정스런(?) 질문에 성씨는 "이미 주변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라며 개의치 않았다.
저녁 모임에 참석해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도 "남편 밥 챙겨줘야 한다"며 급하게 자리를 뜨는 주부들을 보면 "남편을 붙잡아 얘기 좀 해야겠다"고 말하는 그는 "아내의 행복지수는 남편에게 달렸다"며 "남자의 자세가 달라져야 사회의 근본인 가정의 뿌리도 튼튼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사진: 취미생활로 수필을 쓰는 성씨와 그림을 그리는 송
씨 부부. 문학과 예술로 부부가 공감대를 가지면서
퇴직 후 노후생활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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