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길 위의 삶-(15)캄보디아-따 프롬(Ta Promhm)

세월의 한 복판에 서 있는 '나무의 조상'

꼬박 이틀을 앙코르 톰과 앙코르 와트에 취해 있다. 원래 일주일을 계획한 중에 도착한 날과 출발할 날을 빼고 또 이틀을 보냈으니 이제 사흘의 여유가 있는 셈이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따 프롬으로 향한다.

이 사원은 앙코르 톰을 건설했던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헌정한 불교 사원이다. 따 프롬은 실제로 앙코르를 대표하는 사원 중의 하나다. 하지만 따 프롬이 대표 유적이 된 이유는 앙코르 와트의 거대함이나, 바이욘의 신비함, 반띠아이 쓰레이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거대한 자연 앞에 다시 돌무더기가 되어가는 세월의 절박한 현장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대한 나무뿌리에 의해 철저하게 벌거벗은 그 모습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입구로 이어지는 오솔길에는 다른 사원에 비해 유난히 굵고 큰 나무들이 마치 이 사원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 서 있다. 입구를 지나자 '나무의 조상' 이라는 뜻의 사원은 그야말로 돌과 나무로 엉켜 있다.

건물의 지붕 위에 자리를 잡은 거대한 뿌리, 단층의 길고 낮은 건물들 사이로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돌무더기, 그 곁에 아무렇지도 않게 삐죽이 고개를 내민 잡초들, 쓰러져 가고 있는 탑을 감싸고 있는 나무, 그 사이에 불현듯 나타나는 압사라의 청초한 미소까지…. 캄보디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위대한 왕이 어머니에게 바친 사원 곳곳에 나붙은 "위험"과 "출입금지"의 경고 표지판은 세월의 상처이건만 오히려 그 상처는 사람들만의 것으로 보인다. 바위틈을 헤집고 들어와 건물을 갈라놓은 나무와 돌은 서로 어깨를 기대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고서 그저 말없이 세월을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 영화 '툼 레이더' 촬영 장소

인생은 무상한 것이지만 세월은 그 무상한 인생마저 뜨겁게 끌어안으라고 말한다. "툼 레이더"라는 영화에서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가 연기한 장소를 찾아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던 중국관광객들이 빠져나간 자리엔 스산함마저 감돈다. 하지만 입술이 부담스러운 미국 여배우든, 중국관광객이든 따 프롬에는 그저 스쳐가는 바람 같은 세월이 있을 뿐이다. 장난감 악기를 파는 소녀가 흙바닥에 꽃을 그리고 있다. 때 묻은 맨발 위에 놓인 그림자가 슬프다. 그 꽃이 어떤 꽃인지 차마 묻지 못한 것은 연꽃이든 해바라기든 잠시라도 고단한 삶의 그림자를 바닥에 누이고 있는 순간을 방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잡초를 뽑고 있는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그 곁에 가난한 화가의 캔버스에는 부족한 물감이 이미 색 바랜 따 프롬을 담고 있다.

길을 물어 니악 뽀안을 찾는다. 반띠아이 쓰레이가 붉은 조각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면 사원의 구조 자체가 아름다운 니악 뽀안은 자야바르만 7세 때 병원의 용도로 지어진 것이다. 중앙에 탑을 지니고 있는 연못을 가운데에 두고 네 개의 연못을 지닌 이 사원은 물이 말라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어 순례자들이 몸을 씻어 자신의 병을 낫게 기도하는 곳이었다. 자신이 나병을 앓았던 왕은, 이 사원을 부처에게 바치며 아마도 자신의 병이 낫기를 기도했을지 모른다. 신의 권력을 얻었지만 불치병을 앓고 있던 왕에게 니악 뽀안은 희망이 되었을까? 깊은 밤, 자신의 모습을 감추며 사원을 찾던 왕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메마른 연못의 바닥에서 아낙네들이 나물을 뜯고 있다. 병을 낫게 하는 약초라는 말에 한입 베어 물었지만 맛이 쓰다. 무더위에 자전거를 탄 탓인지 게 눈 감추듯 점심을 해치운다.

서 바라이를 찾는다. 서 바라이(인공호수)는 앙코르에서 가장 큰 인공 호수로 물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져 지금껏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열대 우림의 호수에는 아이들이 수영을 즐기고 음식을 파는 장사치들로 번잡하다. 호수 중간에 있는 작은 섬에 있는 서 메본 사원으로 가기 위해 작은 배를 탄다.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승객은 혼자다. 사공은 건기에 물이 마른 호수 밑바닥에 행여 배가 닿을까 뱃길을 내느라 연신 바쁘다. 겨우 섬 기슭에 닿자 잡초 무성한 작은 언덕 위에 무너져 내린 담만이 이방인을 맞는다. 젖은 얼룩 옷을 입은 아이들이 여행자를 따라 다닌다. 시계조차 처음 보는 아이들과 말이 통할 리 없지만 이미 마음을 통한 아이들은 숨겨진 우물로 안내하고, 원두막에 앉아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다. 말이 무슨 소용이랴! 마음을 나누는 것은 바벨탑의 저주를 푸는 열쇠가 아니던가? 아이들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를 위해 배를 밀고 얼굴을 확인할 수 없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이 소중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냥 눈물이 흐른다.

◇ 힌두교 사원에 모셔진 '부처님'

바꽁은 9세기 후반에 지어진 사원으로 시바에게 바쳐진 힌두교 사원이다. 앙코르 초기 유적으로 전형적인 앙코르 사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해자는 말라 있다.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 나가를 조각한 다리를 지나자 사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원 입구 왼 편에 세워진 학교는 한참 수업 중이다. 한 쪽 벽이 틔어진 교실에서 아이들은 낯선 여행자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고운 꽃들이 사원 입구의 계단에 한창이다. 눈에 익은 사자상이 탑을 지킨다. 불국사 다보탑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것이다. 자세히 보면 탑의 양식마저 닮아 있어 보이지만 증명하기에는 여행자의 지식이 너무 짧다. 사원의 모든 층의 모서리에 코끼리가 서 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어떤 짐승인지 알 수 없도록 파괴되어 있다. 유독 코와 꼬리가 파괴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을 복원할 때 쇠붙이를 넣었기 때문이다. 엿이라도 바꾸려는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 같지만 종교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못난 행동이다.

사원의 중앙 성소에는 억지로 모신 부처도 종교적 충돌의 하나다. 구태여 힌두교 사원에 부처를 모시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싶다. 팔이 여러 개 달린 비슈누를 부처로 모시는 앙코르 와트의 여유가 살갑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하고 있다. 그녀들의 얼굴은 환한 웃음으로 가득하다. 그들에게 이 나라의 미래가 있다고 믿는 것은 여행자의 어설픈 낭만일지 모르지만 믿어야만 할 것 같다.

◇ 앙코르 문명 시작된 곳

"외국인들은 잘 가지 않는 곳이에요." 프놈 꿀렌을 찾는 길에 운전기사는 말한다. 802년 자야바르만 2세(Jayavaman Ⅱ)가 신을 자처하고 앙코르 문명을 시작한 곳이지만 크메르 루즈 게릴라가 마지막까지 출몰했던 지역인데다가 승용차로 2시간 가까이 걸리는 길이 쉽지는 않다. 앙코르 유적의 사암들이 이 곳에서 옮겨졌고 흐르는 강바닥에 수천 개의 링감(Lingam, 남근(男根))을 새겨 백성들에게 강물을 통해 축복을 내리고자 했던 프놈 끌렌은 작은 언덕조차 찾아보기 힘든 씨엠립의 평원에서는 꽤나 높은 산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계단을 오르니 불교 사원이다. 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 암자를 짓고 그 안에 와불상을 모셔두었다. 와불상의 발끝에 놓인 지폐들이 기원을 빌고 있다. 이 와불은 앙코르와는 무관하다. 수천 개의 링감보다 부처에 대한 신심이 각별한 후세의 사람들이 조각한 것이다. 부처는 스스로 깨닫기를 원했지만 사람들은 기대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링감이 새겨져 있는 강은 개여울이다. 무릎 깊이의 강바닥에 깔려 있는 링감과 시바신의 조각은 신임을 자처한 왕의 마음을 담고 있는 듯하다. 물이끼를 한껏 머금은 금빛의 링감, 그 축복이 강물을 통해 백성에게 전해지기를 원한 왕의 마음은 널리 베푸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 강물에 발을 담구고 더위를 식히고 있다. 그들은 기억하지 못할지 모른다. 앙코르가 시작된 이 물길이 얼마나 소중했는가를….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운전기사가 휴대전화를 가지고 놀고 있다. 캄보디아는 유선전화가 보급되기 전에 이미 무선전화가 보급되어 공중전화도 휴대전화를 쓰고 있다. 시동을 걸며 그는 휴대전화를 보여준다. 포르노 동영상이다. "제팬니스"를 외치며 그는 엄지를 곧추 세운다. 편리하다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오토바이에 가족을 태운 중년의 사내가 힘겹게 산길을 오르고 있다. 오랜만의 나들이로 인한 가족의 행복이 느껴진다. 흙먼지를 일으키는 자동차를 피하면서도 손을 흔드는 아이의 눈은 여전히 맑고 아름답다.

전태흥 자유기고가

사진: 따 프롬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나무.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