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굶주림과 다이어트

크리스마스가 바짝 다가온 세밑이다. 한해의 끝이 눈앞인데 우리의 삶은 여전히 썰렁하다 못해 황량하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답답하고 서글픈 풍경들 뿐, 새롭고 밝은 길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햇빛이 눈부셔도 그늘은 있게 마련이나, 올해는 유난히 그 그늘이 지겹고 아프다. 그 끝은 보일 기미마저 다가오지 않는다.

남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아쉬워

선현(先賢)들은 사람에겐 가슴 깊숙이 남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그 본성을 따르면 '나누는 쪽'이나 '베풂을 받는 쪽' 모두 기쁨을 느낀다고도 가르쳤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마음들이 메말라 버린 걸까. 헐벗고 소외된 이웃을 향해 켜지는 마음의 작은 등불들, 온정의 손길들이 간간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워낙 어둠과 그 그늘들이 두터워서인지 이내 묻혀버리고 마는 느낌이다.

장기 경기침체로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어려워졌다. 빚 독촉에 시달리거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삶을 내팽개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죽인 뒤 자신의 목숨도 끊는 등 생계형 자살이 이어지고, 굶어서 죽는 사람까지 나오고 있는 판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민생(民生)이나 상생(相生)보다는 힘 겨루기나 정쟁(政爭)에 신경이 가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그런 와중에 외환위기 이후부터 크게 우려해온 빈부 격차가 확대되는 실정이다. 그 결과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의 골은 더 깊이 파이고, 개인주의와 위화감·박탈감도 고개 숙이기는커녕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회가 둘로 갈라져 버릴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눈은 슬픔의 샘, 입은 기쁨의 샘, 심장은 사랑의 샘, 쓸개는 시기의 샘'이라 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눈'과 '쓸개'만 커지고, '입'과 '심장'은 쪼그라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웃음과 사랑보다는 슬픔과 시샘이 팽배하는 사회는 비극의 도가니에 다름 아니다.

요즘 굶주림에 대한 논의가 부쩍 많아지고 있지만, 그 근본 원인은 식량의 절대량 부족이나 인구 때문이기보다는 사회적 불평등과 지나친 개인주의에 있지 않나 싶다. 외환위기 이후 이렇다 할 비판이나 검증 없이 받아들여진 신자유주의, 거기 보태진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는 우리 사회를 그런 방향으로 치닫게 하는지도 모른다.

한 통계에 따르면 정부가 공식적으로 점심 급식비를 제공하는 '결식 어린이'가 30만여 명이나 되고, 117만 명 정도가 결식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책적·사회적 관심이 미치지 않아 그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절대빈곤으로 시달리는 사람들과 통계에 잡히지 않는 노숙자 증가 등을 고려한다면 굶주리는 계층은 이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또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비만 인구가 날이 갈수록 크게 늘어나고, 배불리 잘 먹고 나서 살찐다고 고민하면서 '살과의 전쟁'을 벌이는 아이러니가 도처에서 연출된다. 소위 '웰빙(well-being)' 열풍은 돈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극성이며, 다이어트 제품 시장이 급성장하는 추세다. 심지어 굶어 죽는 어린이가 있는 한편에서는 1천만 원 정도나 들여 호화판 생일잔치를 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음식점만 보더라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다. 주말에는 이름난 식당마다 장사진을 이루며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그러나 '가격 파괴' 식당을 찾는 행렬은 그보다 훨씬 더 길어지고 있다. 술집도 그렇다. 최고급 집에 손님이 이어지는가 하면, 골목마다 막걸리 대폿집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나 살고 너 살자'는 분위기 돼야

최근만도 대구에서 한 어린이가, 애달픈 사연이야 어떠하든, 굶주리다 죽었다. 광주에선 살 길이 막막한 아버지와 아들이 동반자살을 했다. 더구나 이 같은 비극은 앞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헐벗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어린이가 무참한 죽음을 당한다는 비극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린이들의 굶주림은 그들의 몸뿐 아니라 정신에도 엄청난 상처를 주며, 그들의 내일마저 갉아먹는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사람들은 '나눔'과 '배풂'에 너그러워질 수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웰빙으로 '너 죽고 나 살자'는 생각이 남아 있다면, 그런 생각을 지운 자리에 '나 살고 너 살자'는 마음을 앉히는 '사회적 웰빙' 배려의 분위기가 확산된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따뜻해지겠는가.

이태수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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