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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5)동해남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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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함께 익어가는 문학 그리고 정

'동해남부시(東海南部詩)' 동인은 올 겨울로 꼭 30년이 되었다. '동해남부문학'이 창간된 것은 1975년 12월. 국토의 동해 남부지역인 경주, 포항, 영덕, 울산의 문인들이 만나 동인지를 만든 것이 오늘날 '동해남부시' 동인의 모태가 되었다.

그때 창립 회원들은 포항의 한흑구, 경주의 이근식·정민호·서영수·김정석·김이대·김홍주, 울산의 김성춘·강순아·박상륜, 영덕의 방태석·박윤환·이장희 등 13명이었다. 주로 향토적 서정을 추구하는 지역 문인들 간 친목과 문학 교류를 위해 동해남부선 문학열차의 기적을 울린 것이다.

동해남부시 동인의 화두는 문학과 술이었다. 문학과 술은 바늘과 실의 관계인가. 시인은 물론 수필가와 아동문학가까지 포함된 이들 동인들에게 술은 필연이었다. 동해남부문학 창간호가 나오고 이듬해 신춘을 맞아 출판 기념회를 열 때부터 그랬다.

낮부터 거나하게 오른 술은 이름 모를 여관에서 밤늦도록 계속됐다. 처음에는 서로 시를 읽어주고 작품평을 하는 등 문학과 술이 함께 익어갔다. 그러다가 밤이 이슥해지면 본격적인 주신(酒神)과의 대화를 나누는데,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누군가 먼저 취해 드러누운 동료 문인에게 이불을 뒤집어씌우고는 갑자기 "애고 애고 애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아이고, 죽었네, 아이고…"하면서 머리맡에 술잔을 따라놓고 소리 높여 곡을 했다.

온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따라 울자 빈사상태로 누웠던 사람이 그제야 벌떡 일어나 앉으며 "와 우노, 응, 와 우노"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방안은 금세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런 식이었다. 희로애락을 넘어선,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도 초탈한 낭만과 풍류. 동해남부시는 그런 문학동인이었다. 그러다 8년 만인 1983년 봄 동인지 '동해남부시' 봄호를 출간하면서 동해남부문학은 시인들로만 구성된 '동해남부시' 동인모임으로 거듭났다.

10명의 시인들이 영덕에서 출발해 포항, 경주를 거쳐 울산에 와닿는 '동해남부시 열차'를 다시 개통시킨 것이다. 영덕의 방태석·박윤환, 포항의 장승재, 경주의 이근식·설성희·정민호, 울산의 이준웅·최종두·박종해 등이 그들이다.

동인지 봄호에는 동해남부 지도를 그려넣어 동인지의 성격과 노선(?)을 애써 규명했다. 영덕에 모여서 다시 출판기념회를 했다. 영덕문화원 강당에서 제법 격식을 갖춘 행사가 진행됐다. 마치자마자 술자리가 마련됐다.

빈속이었지만, 모두가 주호(酒豪)들이어서 막걸리 한두 잔에는 간에 기별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술이 버스정류장 옆 중국집으로 이어지며 해가 기울도록 끝나지 않았다. 포항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리는 즉시 간이 주점에 앉아 또 소주를 시켰다.

그날 밤 포항에서 경주로, 울산으로 가는 시외버스도 비틀거렸다. 세월 따라 강산도 변하고 시인도 더러는 유명을 달리했다. 그때 30대의 동인은 갑년이 지났고, 40대였던 동인은 칠순이 넘었다. 동해남부시 열차의 노선도 대구~경주~울산~부산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경주의 이근식·정민호·이희목·서영수와 대구의 도광의·박곤걸·이장희, 울산의 김성춘·박종해, 부산의 강정화 시인 등 10명이 동해남부시 열차의 승객이다. 이근식 시인이 일흔여덟로 최고령 단골이고, 50대의 강정화 시인이 가장 소장파 손님이다.

모두가 지역의 문인단체 간부와 각종 문학상을 수상한 문단의 원로, 중진들이다. 대구의 낭만파 '그리운 남풍'의 도광의 시인이 동해남부행 열차에 합류하면서 동해남부시 동인들의 술과 낭만적 도취는 더욱 무르익었다.

연말에 나온 동인지 제29호 출판기념회를 핑계삼아 경주에서 또 한잔씩 거나하게 주고받을 일이 남았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정겨운 풍경. 하루종일 마셔도 헤어지기 섭섭한 날이 될 성싶다. 동해남부시 열차는 그렇게 문학에 대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싣고 내년에도 묵묵히 달릴 것이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사진: 1980년대 후반 가을 어느 날 영덕에서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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