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꽃소식이 들려오는 삼월이다. 남도의 여수 오동도에서는 어제부터 동백꽃 축제를 열어 바다와 섬과 동백꽃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러 오라 한다. 어느 핸가 꼭 이맘때 오동도를 제목으로 쓴 시 한 편을 읽어보며 문득 동백꽃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봄바람이 마음속에다 먼저 꽃길을 재촉한다.
'이른 봄날이면/ 감감무소식의 사람들이/ 관제엽서처럼 날아드는 곳/ 뱃길 말고는 이정표가 없는/ 종착역을 빠져나오면/ 스치는 사람마다 동백꽃으로 피어나는/ 섬이 있다.'
오동도에서 동백꽃 소식이 당도하면, 리라유치원 정문 앞 멀쑥하게 키만 큰 목련 나무가 하룻밤 사이에 흰 꽃들로 가득해진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에 이어 팝콘처럼 부풀어오르는 벚꽃들에 취해 나는 봄이 다 가도록 꽃 몸살을 앓는다.
며칠 전 꽃샘바람이 봄의 옷깃을 잡고 심통을 부리고 있을 때, 갈 곳도 마땅찮아 오후 한나절을 집에서 보내며 TV 뉴스나 보고 있었다. 아프리카 3개국을 순방 중인 대통령이 알제리를 방문하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알제리'라는 나라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의 이름 하나를 간신히 기억 속에서 찾아냈다.
무슈 페레즈! 무슬림의 부모를 따라 프랑스에 정착해 프랑스의 교육을 받은 알제리 사람. 사회보장제도가 잘 돼있는 프랑스의 생활이 아무리 편안해도 은퇴하면 고향 알제리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싶다던 사람이다.
호남화력발전소를 건설하던 해였다. 프랑스의 알스톰사에서 터빈발전기의 제작과 설치를 위해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나는 기본적인 영어실력 몇 마디를 가지고 그 회사에 취직을 했다.
필요한 실력을 갖추기 위해 밤늦게까지 혼자 남아 텔레타이프로 국제 전송문을 보내는 기술부터 익혔다. 그리고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영문 타이핑을 손가락 끝에 불이 나도록 연습했다. 내 속의 가능성을 실험해 보던 당찬 시절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어지는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때 서투른 나의 업무를 도와주던 사람이 무슈 페레즈다. 그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몇 번을 물어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무슬림의 아들답게 모든 일에 철저했지만 의심도 많았다.
특히 건설현장에서 부딪치는 이방인들을 경계했다. 사람에 대한 것은 모두 내게 먼저 물었다. 나는 그가 믿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현장 소장인 듀보 씨의 자상한 배려도 생각난다. 떠나면서 '라퐁텐의 우화'를 선물하고 더 좋은 곳에 나의 직장을 마련해 주었다.
내 인생의 한가운데 밝은 색조를 마음껏 칠해 주고 떠난 그분들의 고마운 정이 새삼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이렇게나 늦게 그들의 안부를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듀보 씨는 그때도 연세가 많았으니까 세상을 떠났을 것 같다.
그러나 무슈 페레즈는 어쩌면 그가 소원했던 대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알제리를 방문한 기사를 보고 한국의 반도 끝에서 만난 당돌한 아가씨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꽃샘 추위가 끝나면 동백꽃 보러 오동도에 가야겠다. 한두 번 그들의 가족과 함께 소풍을 갔던 그곳에서 몇 그램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속이 풀릴 것 같다. 아프지 않고는 이 봄이 갈 것 같지가 않다.
'오동도'의 뒷부분을 읽으며 꽃샘바람 덕분에 건진 소중한 추억 한 편을 붙잡고 그리움을 달래본다. '먼길 돌아와/ 더 이상 탕진할 것도 없는 나는/ 동박새 놀다간 동백나무 가지 끝에/ 탁본(拓本)한 생을 조등으로 걸어놓고/ 매기지 못하는 선소리 한마당/ 동박새 울음으로 풀어놓는다.'
엄정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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