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3·1운동이다. 하지만 학계는 3·1운동의 의미를 능가하는 독립운동을 주목하고 있다. 바로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 올해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최대 사건인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지 꼭 100년 되는 해. 매일신문은 우리 민족 역사의 중심을 항상 지켜왔던 대구·경북의 자긍심을 드높여줄 '대사건'인 국채보상운동 발발 100주년을 맞아 2회에 걸쳐 이 운동의 의미를 살펴본다.
첫 회에서는 당시 역사적 사실을 현대적 사건기사 형식으로 재구성, 100년전 기억을 되살리고, 2회에서는 대구시내 곳곳에 산재해있는 국채보상운동 흔적들을 찾아본다.
1907년 2월 21일 오후, 대구 북문 밖 북후정(오늘의 시민회관 터)에서 2천여 명이 넘는 시위대가 집결, 집회를 벌였다. 이날 집회는 대구가 생긴 이래 단일 집회로는 최대 규모.
시위대는 즉석에서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엄청난 액수가 이날 하룻동안 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대는 담배를 끊어 대한제국의 대외채무를 청산, 독립국가의 위치를 유지하자는 주장을 폈으며 이 소식을 들은 고종 황제까지 이 운동에 동참해 시위의 위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사실상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지화를 진행중인 일본 통감부는 전국적으로 유사 집회가 확산되고, 이른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화하면서 크게 우려하고 있다.
◆사건발생
이날 집회는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라는 명칭을 썼으며, 대구 최대 인쇄소인 광문사 사장 김광제 씨와 같은 회사 서상돈 부사장이 주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의 주도로 열린 집회에는 대구지역 유지와 지식인들은 물론, 부녀자들도 참석했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노숙자까지 집회에 가세했다.
이날 집회에서 박정동 씨는 연단에 올라 "건강에 해로운 담배를 3개월만 끊은 뒤, 그 돈을 모아 나라빚을 갚자."고 역설했다.
박 씨의 연설이 끝나자 즉석에서 모금이 진행됐으며 대다수 집회 참가자가 주머니를 털어 돈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이날 집회 주도자인 김광제 씨와 서상돈 씨를 비롯, 10여 명의 대구시내 유력 인사들이 1907년 1월 29일, 김 씨가 사장으로 있는 광문사(현재의 중구 서야동 대성사 자리)에서 만나 "대한제국의 대외 채무 1천300만 원을 갚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며 전 국민이 모금에 참여하는 이른바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의했었다.
이 자리에서 서상돈 씨는 800원을 내기로 약속했고, 김광제 씨도 3개월동안 담배를 끊으면 금방 만들 수 있는 돈이라며 10원60전을 즉석에서 냈다. 이날 모임에서만 2천여 원이 모금됐다.
◆사건발생 배경
대구·경북 지역민을 비롯, 우리나라 사람 대다수가 급증하는 조선의 대외 채무를 크게 우려하면서 이번 시위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됐다.
일제는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 일제가 지정해준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대한제국에 파견키로 하면서 대한제국의 대외채무가 급증했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제를 파탄 상태로 빠뜨려 이른 시일이내에 일제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인 재정고문을 이용, 대한제국이 일제로부터 잇따라 차관을 도입하게 만들었다.
일제는 1905년, 대한제국의 문란한 화폐를 정리해야한다며 화폐정리채 300만 원을 들여온 것을 비롯, 같은해 12월엔 화폐개혁 이후의 금융공황을 구제해야겠다며 150만 원을 또다시 차입해들어왔다. 일제는 일본인 고문들의 월급까지 대한제국으로부터 받아 챙기고, 이 또한 차관으로 충당케하면서 대한제국의 대외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905년 이후 1907년까지 불과 2년 동안 대한제국은 원금만 1천650만 원에 이르는 대외 채무를 지게됐으며, 1907년 2월 초 일부 채무정리를 하고도 1천300만 원의 빚이 그대로 남았다. 1천300만 원은 대한제국의 연간 재정규모와 맞먹는 것이어서 대한제국의 자력적인 채무상환은 불가능한 상황. 때문에 김광제·서상돈 씨 등 대구의 유력 인사들이 채무상환만이 대한제국의 유일한 정상화 길이라며 시위를 하고 나선 것.
특히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군수품을 들여오면서 담배도 함께 도입, 대구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유통됐다. 때문에 대구·경북 지역민들의 담배소비가 급증하면서 가계에 부담으로까지 작용,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제의 담배 유통에 대한 비판이 커져왔다.
결국 국가적 채무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지역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담배 소비를 동시에 해결하자는 취지로 이 날 시위가 발생했다.
◆일제의 대응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과 관련, 고종 황제가 단연(斷煙)에 참가해 이 운동에 동참키로 했고, 전국의 각 신문사가 이를 잇따라 호의적으로 보도하면서 상반기에만 230만 원이 모금되는 등 기록적인 액수가 모였다. 대한제국의 대외채무 5분의1에 육박하는 돈이 불과 몇달만에 모아진 것.
유명한 안중근 의사는 함경도에서 이 운동에 참여했고, 안창호 의사는 미국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는 등 모든 국민이 이 운동에 열심이었다.
이와 관련,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보도하면서 이 운동의 전국화를 유도한 대한매일신보사 양기탁 주필(국채보상기성회 총무)을 전격 구속했다. 일제는 이 운동이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화를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로 여기고 있으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 운동의 확산을 막기로 결정했다.
양 주필은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모금된 돈을 상당 부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양 주필 주변 사람들은 그의 혐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양 주필은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일제가 공권력을 동원, 이 운동에 대한 저지에 나서면서 국채보상운동이 1907년말을 기점으로 사실상 끝났지만, 일부 민족운동가들은 "국채보상운동은 우리 민족 5천년사에서 일어난 최초의 국민운동"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모금된 돈을 처리하기 위해 '국채보상금 처리회(회장 유길준)'가 결성됐으며 이 단체는 향후 이 돈을 민립(民立) 대학 설립운동에 보태기로 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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