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근엄한 모자

마음의 안개를 걷고 물끄러미 바라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일상이 정말 새콤달콤하게 '잘사는' 삶이 아니라, '남들에게 좀더 잘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가식이 섞여 있거나 '이미 잘살고 있다.'는 것을 크렁크렁 과시하는 삶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마다 가식과 과시의 모자를 머리에 얹고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모자를 과감하게 벗어 내던지고, 평생을 달려오던 길에서 갑자기 우회전 또는 좌회전하여 정말로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젊은 시인 이기홍이 쓴 '근엄한 모자'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일상생활의 고삐에 질질 끌려가며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속물이 되어가는 우리네 자화상에 대해 성찰하고 있습니다. 아니 조롱과 야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예식장에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그는 내 가슴 속에 살면서도/맨 위에 올라가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어쩌면 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그러나 가끔,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는 그가/차갑고 근엄한 얼굴을 치켜들면/사람들은 그에게로 다가가/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립니다/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나보다는 그에게/더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 속이 몹시 상합니다/이제 그가 없으면 나는/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 모릅니다/그래서 난 외려 그의 보디가드가 됐습니다/그의 뾰족한 코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진 않을까/낯선 바람에라도 끌려가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조금도 맘 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봐야 합니다/슬그머니 내 머리 위까지 올라와 상전이 된/그를 위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이렇게/나와 다르게 살아야 하나요/그를 몰아내고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이 시에서 '그'는 물론 모자이지요. 모자이면서 내가 가진 권위나 돈이나 명예의 옷을 입은 또 다른 '나'이지요. 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이 진정한 나보다는 그에게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서 속이 몹시 상하지만, 어쩝니까, 이제 그가 없으면 정말의 나는 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도 모르니 내가 그의 보디가드가 될 수밖에요. 힘들고 지겨워도 여름날 수캐마냥 헐떡이며 보디가드 노릇을 할 수밖에요. 그런데 나의 상전인 그를 위해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는 죽을 때까지 참고 견뎌야만 하는지….

당신은 어떤 모자를 쓰고 계십니까?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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