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 시조산책-유재영 作 '물총새에 관한 기억'

물총새에 관한 기억

유재영

작자 미상 옛 그림 다 자란 연잎 위를

기름종개 물고 나는 물총새를 보았다

인사동 좁은 골목이 먹물처럼 푸른 날

일곱 문 반짜리 내 유년이 잠겨 있는

그 여름 흰 똥 묻은 삐딱한 검정 말뚝

물총새 붉은 발목이 단풍처럼 고왔다

텔레비전 화면 속 녹이 슨 갈대밭에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간다

길 없는 길을 떠돌다 되돌아온 물총새

'작자 미상 옛그림'은 민화일시 분명합니다. 물총새는 오리와 함께 연화도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지요. 한 마리는 연밥 위에 앉고, 다른 한 마리는 그 곁으로 막 날아 내리는…. 먹향이 번지는 인사동 좁은 골목. 물총새가 날아들면서 화면은 아연 활기가 넘칩니다.

민화는 그림 이면의 상징성을 읽는 게 중요하다지요. '물총새에 관한 기억'이 두 갈래로 나뉘는 것도 그런 연유라 여깁니다. 일곱 문 반 시절의 상하지 않은 자연 속의 물총새와,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가는 물총새의 극명한 대비. '길 없는 길을 떠돌다 되돌아온 물총새'는 아무래도 생태적 위기에 처한 인간 존재의 다른 모습인 듯싶군요.

'먹물처럼 푸른', '녹이 슨 갈대밭' 같은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이 빚어내는 미묘한 말의 낙차도 놓쳐서는 안 될 대목입니다. 바로 이런 데서 의외의 의미 공간이 열리니까요. 한 수의 시조 속에 교차하는 '흰 똥', '검정 말뚝', '붉은 발목'은 그대로 해묵은 당채의 느낌입니다.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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