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셀도르프 근교 노이스 홀츠하임의 숲에 숨어있는 인젤 홈브로이히(Insel Hombroich)는 미술품 수집가이자 예술후원자인 뮐러((Karl-Heinrich Muller)가 오랜 시간 공들여 이룩한 유토피아라 할 수 있다. 그는 세잔이 꿈꾸었던 '자연과 함께하는 예술'을 실현할 장소를 짓기 위해 코르테(Bernhard Korte)에게 조경 디자인을, 조각가 헤리히(Erwin Heerich)에게 건축을 맡겼다.
'홈브로이히 섬'이란 이름을 가진 이 미술관의 특징은 '자연보호구역, 설명이 없는 작품들, 단순하지만 품격 있는 건축물'로 요약될 수 있다. 에르프트 강에 둘러싸인 약 20만㎡ 크기의 '섬'에 대해 뮐러는 "섬은 생명을 낳고 양육하고 보듬어준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여성적"이라고 했다. 이렇듯 모성처럼 방문객들을 보듬는 인젤 홈브로이히는 예술적 창조를 잉태한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라 하겠다.
간결한 선과 기하학적 형태로 구축된 헤리히의 조각을 확대한 듯한 건축물들은 중후한 벽돌 외벽, 회색 대리석 바닥, 눈부시게 흰 내부 벽면과 자연채광을 끌어들이는 유리창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섬 일대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16개 건축물 중 '탑'과 '그라우브너 파빌리온'은 그림 없는 전시공간이다. 감성으로 충만한 이 빈 공간에서 우리는 창 너머 수목을 관조하거나 명상과 침묵의 세계로 침잠하게 된다.
여러 개의 방으로 연결되는 '미로'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동서고금의 예술품들을 수집한 뮐러의 호기심과 자유분방한 사상이 여실히 드러나는 전시장이다. 아프리카 조각, 캄보디아 불상, 중국 인물상과 그릇들이 세잔, 아르프, 클라인, 그라우브너의 회화와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지키는 사람도 없고, 조명도 없이 자연채광만 된 공간에 통시성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설치된 작품들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은 궁극적으로 아무런 전제와 편견 없이 예술과 접하는 순수한 경험을 하게 된다.
1980년대 말에 건립된 이 미술관은 자연-예술-인간의 동화를 통해 평화롭고 이상적인 삶을 제시하는 장소가 되었다. 나아가 1990년대 중반에 설립된 인젤 홈브로이히 문화재단은 근처의 옛 미사일 기지를 연구소, 도서관, 작업실, 콘서트홀 등으로 구성된 복합문화예술단지로 확장할 계획을 세우고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초대한다. 자연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안도 다다오의 랑엔(Langen) 미술관은 빼어난 조형미로 관람자의 넋을 잃게 만든다.
한편, 뒤셀도르프 시는 소장품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2002년에 기존의 시립미술관을 확장한 K20(Kunst) 미술관을 개관하여 20세기 초부터 1980년대까지의 작품을 취급하게 했다. 그리고 주의회 건물을 리모델링한 K21 미술관도 함께 개관하여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의 미술을 다루고 있다.
스위스 바젤에 있는 샤우라거(Schaulager) 미술관에서는 10월 14일까지 미국작가 고버(Robert Gober)의 특별전을 열고 있다. 이 전시를 위해 미술관 공간을 대대적으로 개조한 점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자연과 합일하는 예술을 구현하는 미술관, 새로운 밀레니엄 미술관, 한 전시의 콘셉트에 맞춰 공간을 개조하는 미술관의 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대구시립미술관이 어떤 독창성을 가지고 출발하는가를 주시하는 시점에선 더욱 그렇다. 여느 미술관에서 볼 수 없는 작품을 소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차별화'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또는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제안도 없다.
작품이 위치할 장소는 공간을 활성화하고 감동을 '현재화'한다. 아직 미술관이 나아갈 방향이나 구체적인 공간도 정해지지 않는 상태에서 미술관을 홍보할 전시가 개최될 것이라고 한다. 대구의 역사적·지질학적·생태적 환경을 숙고하고 현대미술의 비전을 제시한다는 이 전시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와 카셀 도쿠멘타를 얼버무린 듯한 성격의 행사로서 미술관의 방향성 제시와는 무관하게 보인다. 진지한 연구와 토론의 장을 마련하여 여러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박소영(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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