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에 대한 횡령, 배임 등과 관련된 항소심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이 검찰의 주요 기소 내용 대부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처벌은 미약했다. 집행을 유예하면서 2013년까지 8천400억 원을 사회공헌기금으로 출연하고, 강연회와 언론 기고를 통해 준법 경영의 중요성을 알리라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을 두고 재벌 총수에 대한 온정주의라는 원칙론과 기업 경영인에게 사회 기여의 기회를 주는 것이 유익하다는 현실론이 맞서고 있다. 양쪽의 논리 체계는 시작부터 끝까지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서로 대비하며 이해해둘 필요가 있다.
▨ 현실론-윤리·투명 경영으로 보답
2심 재판부의 판결은 현실론이라고 볼 수 있다. 법의 잣대를 지키면서 국가 경제를 고려한 판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당수 언론은 판결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자동차 산업의 중요성과 현대차 그룹의 위기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자동차 산업은 작년 무역흑자 373억 달러를 기록한 국가경제의 핵심이다. 국내 자동차 생산의 80%를 차지하는 현대차 그룹의 경영이 흔들리는 것은 우리 자동차 산업이 흔들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정몽구 회장 재판에 국민적 관심이 쏠린, 그리고 각계서 법 논리와 경제논리의 조화를 기대한 까닭이다.'(신문 사설)
이어지는 논리는 기업인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처음부터 보다 신중하게 하라는 주문이다. 정 회장 판결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렵고 기업인 사기가 말이 아닌데 기업인들을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집단인 양 매도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 기업 의욕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파렴치한 행태가 아니라면 기업인들에 대한 조사와 사법처리에 정부가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신문 사설)
이쯤 되면 원칙론자들의 주장이 오히려 형평성을 잃은 역차별이 될 수 있다며 준엄하게 나무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감옥행이라는 명분 대신 실질적인 죗값을 치르도록 한 법원의 결정이 재벌 봐주기로 돌을 맞아야 하는 것일까.(중략) 재벌총수라 해서 봐주는 것도 문제지만, 거꾸로 재벌총수면 무조건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는 인식은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재벌 총수니까 엄벌해야 한다는 역차별의 정서는 해당 기업은 물론 한국 경제를 망치는 독버섯으로 자랄 수 있다.'(신문 칼럼)
정 회장과 현대차 그룹이 판결 정신에 부응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지적은 현실론이 내리는 결론이다. 현실론을 펴는 근거는 현실에서 보여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차 스스로 사회 기여를 보이지 못하면 그 즉시 원칙론이 힘을 얻게 된다.
'이제 정 회장이 집행유예로 족쇄를 풀게 된 만큼 임직원이 혼연일체가 돼 이런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특히 2010년 세계 자동차 5대 업체 도약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설비투자를 통한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 하이브리드차·연료전지차 등 기술 개발에 적극적인 노력을 펼쳐야 할 것이다. 노사관계 안정을 이루는 일도 정 회장이 역점을 둬야 할 중대 사안이다.'(신문 사설)
▨ 원칙론-법치주의 기반 흔드는 단초
회삿돈 900억 원을 횡령하고 계열사에 2천억 원의 손해를 끼친 범법자를 재벌 총수라는 이유로 너그럽게 처리하면 법과 경제 질서를 무너뜨려 사회 발전을 뒤처지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재벌 총수에게 은전을 베풂으로써 얻는 사회 발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원칙론은 재벌 총수에게 사회 기여를 요구하는 여론 못지않게 공평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도 많다고 지적한다.
'정 회장에게 적용된 특정 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죄의 입법 취지를 제대로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재벌 총수의 횡령에 대해 비판적인 국민 정서에도 미흡하다.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법원의 관용이 지나치면 법치주의의 기반이 흔들리는 단초가 된다.'(신문 사설)
온정주의가 불러올 위협에 대해서도 경고를 잊지 않는다. '재벌 총수든 일반 기업인이든 반드시 실형을 살게 해야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흔히 편향된 온정주의는 국민의 법의식을 왜곡하고, 법치주의의 기반을 위협한다. 사회와 법원이 함께 시장논리에 이끌려 경제범죄를 적당히 관용하는 관행이 굳어질수록, 그토록 강조하는 경제의 투명성과 신뢰는 추락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신문 사설)
이번 판결은 돈 가진 사람이 유리한 유전무죄(有錢無罪) 정서를 확인시켜줬을 뿐이라는 냉랭한 평가도 있다. '경제개혁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2000년 이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과 배임 혐의로 기소된 기업인 149명의 84%가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특히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된 기업인의 절반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신문 칼럼)
재판부가 내세운 논리는 당연히 설득력을 잃는다.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과거에는 비자금 조성 관행이 있었다."고 집유 사유를 밝혔다. 납득할 수 없는 논리다. 화이트칼라 사건에서 과거 관행이라는 이유로 선처를 베풀기 시작하면 우리 사회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사회공헌과 관련해 "2013년까지 8천400억 원의 출연을 실행하지 않으면 집행유예를 취소한다."고 못박은 것도 이색적이긴 하나 사법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재판부는 종전의 집유 선고와 다른 엄벌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강조하고 싶겠지만, 국민의 눈에는 돈 가진 사람에게 유리한 또 하나의 유전무죄(有錢無罪) 선고일 뿐이다.'(신문 칼럼)
황제 경영으로 일관해 기업에서의 자기 결정권을 과도하게 높여놓은 정 회장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도 빠지지 않는다.
'현대차가 노조에 끌려다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 회장이 가시적인 성과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데서 비롯된다. 생산목표 달성에 매달리다 강성 노조의 파업 위협을 임금인상으로 막는 게 관행처럼 자리 잡았다. 현대차의 위기가 정 회장에게서 비롯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현대차가 잘 굴러가려면 정 회장은 황제경영을 그만 접고 투명 경영에 주력해야 한다.'(신문 사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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