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 아서 밀러와 명절 증후군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쓴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가 사후에 큰 곤욕을 겪고 있다. 세 번째 부인인 사진작가 잉게 모라스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나자, 일주일 만에 양육기관에 보낸 뒤 평생 아들의 존재를 숨긴 채 살아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이 알려지면서 그에게는 유명 극작가라는 이름 외에 '비정의 아버지'라는 이름이 덧붙었다. 장애인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조차 장애인 아들을 숨겨야했던 밀러를 생각하면, 일각에서의 지적처럼 많이 배운 사람들이 자신의 치부를 더 감추려고 한다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아서 밀러의 기사를 보면서, 지난해 만난 장애아 아버지들의 고백이 생각났다. '함께하는 장애인부모회'에서 만난 아버지들은 장애자녀를 세상에 드러내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 애쓰는 아버지들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장애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의 절망과, 남자라서 남편이라서 아버지라서 울 수 없고 아픔을 말할 수 없었던 고통스런 과거를 토로했다.

그러면서 많은 아버지들이 아이를 직접 품고 낳고 기르는 엄마들보다 자식의 장애를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 시간 동안 엄마는 엄마대로 아이를 혼자 보듬느라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지만, 아버지들은 아버지대로 자신 앞에 닥친 현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어서 비장애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고통을 겪는단다.

당시 나는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배운 사람이기 전에, 많이 알려진 사람이기 전에, 아버지들은 사회에서 성공을 최고의 덕목으로 교육받으며 자랐고, 그래서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분신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었던 '슬픈 남자'들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장애아의 부모가 될 준비를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따라서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충격과 절망은 더 클 수밖에 없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부부가 불화를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은 아서 밀러들이 있을 것이다. 장애에 대한 인식수준이 낮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하늘을 찌를 듯한 나라에서 아픈 자식을 숨기고 버리는 일들이 왜 일어나지 않겠는가. 실제로 많은 장애아 엄마들이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들로부터 '아이를 시설에 맡기고(혹은 버리고) 편하게 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한다.

장애인을 가족의 일원으로 보지 않고 숨기도록 부추기고 조장한 사람들이 우리라면, 아서 밀러와 이 땅의 수많은 아서 밀러들을 탓하기 전에 장애아들을 숨길 수밖에 없도록 만든 우리의 편견을 먼저 탓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추석이다. 대목가격을 피해서 일찍 장을 봐도 무관한 몇 가지 차례장을 보다 보면, 여자들에게 추석은 일찌감치 시작되고 명절피로감도 일찍 찾아오는 것 같다. 그러나 추석이 다가오면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장애아 엄마들의 하소연을 들어보면, 오히려 노동하는 며느리들에게만 쏟아지는 명절 증후군에 대한 염려와 배려가 분에 넘친다는 생각도 든다.

성치 않은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내내 죄인으로 살아오는 장애아 엄마들은, 명절이면 본가에 오지 말고 아이와 함께 쉬라는 시집의 배려(?)에서부터, 시댁에 가더라도 성찮은 자식을 낳은 일이 오로지 열 달을 품은 자신의 잘못인 양, 24시간 손이 필요한 아이를 똥오줌 범벅이 되도록 방치한 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명절이 싫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명절증후군을 내놓고 앓아도 되는 며느리들과는 다르게, 속으로만 앓아야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안 한 비혼(非婚)자들, 재수하는 학생들, 취업난에 시달리는 졸업생들, 때맞춰 승진을 못한 가장들에게, 뭔가를 증명해야만 하는 추석이 깊은 속앓이 없이 지나갈 수 있는 날일까.

추석선물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백화점과 대형마트가 붐빈다. 하지만 추석이 달갑잖은 사람들, 인생의 고된 시련을 한때, 혹은 평생 겪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 한마디 준비하는, 아니, 편견으로 가득 찬 뻔한 말 한마디를 반드시 경계하는 그런 마음의 추석준비도 빠트리지 말았으면 한다.

최경화(경북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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