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근소한 리드를 지키기 위해 오승환(삼성)이 마운드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느낌이 다가온다.
"아, 끝났군. 오늘도 막아내겠지."
세 타자를 범타로 처리하면 "역시 오승환이야."하며 박수를 보내고 간혹 연타를 맞더라도 "결국엔 막아 낼 거야."라고 믿는다. 설상 실점 해 역전 당해도 "오승환이 뭐 신이야? 맞을때도 있는거지. 다음에 잘해." 라며 무한신뢰를 보낸다. 이렇게 오승환에겐 모두 긍정적이다.
그는 패기 가득한 투구로 승리의 수호신이란 이미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야구가 기능 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에 이른 나이에 그가 정복한 야구의 비결이 늘 궁금했는데 그러다 몇 년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2004년 11월 한국시리즈가 열리던 잠실에서 삼성의 이성근 스카우트 과장은 연신 함지박만한 웃음으로 입이 벌어진 채 오승환의 입단을 자랑했다.
"물건이 왔어요, 물건이 왔습니다. 감나무에서 수박이 떨어졌어요." 입담좋은 그가 연신 자랑을 늘어놓았다. "한이닝에 두 타자는 삼진으로 잡걸랑요, 방어율이 0.5예요. 실력도, 성격도 진국입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 "자질에 머리까지 천재라니깐요."
스카우트를 하면서 그의 느낌에 와닿았던 그 무엇이 이제야 내게도 어렴풋이 잡혀왔다.
2005년 입단 첫해 곧바로 엔트리에 들어 중간계투로 나섰던 오승환은 7월14일 첫 세이브를 기록할 수 있는 경기에서 실패, 시즌 첫 패를 기록했다. 신인으로서 받을 상처가 염려돼 주위의 격려가 쏟아졌지만 그는 이미 스스로 결과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인 후였다.
오승환은 이후 후반기 18경기에 등판해 5구원승 2무 13세이브로 완벽하게 방어하면서 팀을 리그 1위에 올려 놓았다. 승부사로서의 감정조절 능력이 '돌부처'란 닉네임으로 비쳐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의 냉철한 안목과 지혜는 끈질긴 인내심에서 비롯됐다. 고교때 외야수에 1번타자였던 오승환은 크게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아니었다. 단국대로 진학하면서 오른 팔꿈치 부상이 왔는데 1학년때 인대 접합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후유증이 나타나면서 재활 기간이 남들보다 길었고 3학년이 되어서야 마운드에 섰지만 투구 후 팔이 저려 숟가락을 들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을 안고 지냈다. 반복된 재활훈련과 연습이 이어지고 4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안정이 됐다.
그 3년동안 그가 스스로 되뇌이고 되뇌인 것은 오직 인내와 도전이었으며 훈련이 뒤따랐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답을 찾아낸 다음 실행에 옮기는 습관도 부상 극복을 위해 그때 터득한 것이다.
어찌 신뢰와 믿음의 탑이 그저 세워지겠는가? 잠재된 그의 내면의 힘은 그의 강속구보다 더 강하다
그래서 이제 곧 달성할 최소경기 100세이브의 기록이 그가 주는 믿음 만큼이나 빨리 다가오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여겨진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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