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7 농촌체험] (16)영주 단산 포도마을

나무에서 배우는 꼬깃꼬깃한 농심

▲ 영주 단산면 옥대리에서 열린 농촌체험행사에서 참가자들이 700년 된 은행나무를 안아보고 있다.
▲ 영주 단산면 옥대리에서 열린 농촌체험행사에서 참가자들이 700년 된 은행나무를 안아보고 있다.

'가을비는 장인 구레나룻 밑에서도 피한다.' 여름장마와는 달리 가을에 내리는 비는 양이 매우 적다는 뜻의 우리 속담이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옛말이 틀린 듯하다. 지루한 가을 장마에다 태풍까지 겹쳤으니 말이다.

가을비가 달갑지 않은 것은 수확을 앞둔 농민이나 마음의 양식을 찾아 농촌으로 떠나는 도시민이나 마찬가지일 게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온 얼굴들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몇달 전부터 벼르고 별렀는데 하필 오늘 비가 온담.'

그래도 하늘이 영 무심하지만은 않은가보다. 대구를 출발할 때만 해도 줄기차게 퍼붓던 빗줄기는 어느새 그치고 남쪽 하늘에는 언뜻언뜻 햇살마저 비친다. 마중 나오신 마을 어르신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진다.

"올까 말까 정말 고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네요." "태풍이 온다는데도 여기까지 오신다고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받았나 봅니다. 허허허."

정겨운 인사를 나누고 트럭에 올라타고 마을을 둘러보러 나선다. 면사무소에서 5km 정도 떨어진 단산댐은 낮게 구름이 깔려 선경(仙境)이 따로 없다.

"댐이 생기기 전인 10여년 전만 해도 저희 마을에서는 해마다 물난리를 겪었습니다. 소백산 자락이다보니 비가 올 때면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엄청났지요. 하지만 이제는 농사용수 걱정도 전혀 안한답니다."

단산댐 근처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700년째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얼마나 굵은지 코흘리개 10여 명이 팔을 이어잡아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세월은 속일 수 없는지 밑둥치 군데군데는 '시멘트 치마'를 입고 있어 체험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참 신기하죠? 모습은 옛날보다 볼품없어졌지만 아직도 가을이면 은행알 몇 포대씩은 주민들에게 선물하는 고마운 나무랍니다."

다시 돌아온 마을에는 와인 빚을 채비가 다 되어 있다.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포도향기가 달콤하기 그지없다. 고사리손들도 조물락조물락 포도송이를 만지는 모습이 꽤나 진지하다. 당도도 재보고 항아리에 정성스레 담는다.

"올 겨울 크리스마스쯤이면 아주 맛있게 익을 거예요. 그 때 다시 놀러오실거죠."

와인 제조면허를 갖고 있는 김향순 포도마을 대표의 표정에는 다시 만날 그 날에 대한 기대가 역력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에 풍악소리가 신명나게 울린다. 처음 잡아보는 북채이지만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처음 만난 쑥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지고 너와 내가 따로 없다. 그러고보니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백산 쑥돈' 삼겹살과 와인이 제법 궁합이 맞는 것 같다.

이튿날 아침, 요란한 소리에 깨어보니 간밤 걱정했던 대로 장대비가 쏟아진다. 태풍 '나리'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갔다는 안타까운 뉴스마저 들린다. 하지만 모든 것은 마음 먹기 달려있다 하지 않았나. 여기까지 와서 그깟 비 좀 온다고 풍요로운 들판을 외면할 수는 없다. 서둘러 아침을 챙겨들고서는 우비를 입고 과수원으로 향한다.

"이 사과는 '하늘이 찍은 사과'랍니다. 얼마나 맛있으면 하늘이 봄부터 우박으로 점지해두셨을까요? 오늘은 특별히 1kg당 2천 원에 드릴게요."

인심 좋은 과수원 주인 아저씨의 말이 재미있었는지 모두들 지갑 열기가 바쁘다. "농사 열심히 지으셨는데 비가 많이 와 걱정이시겠어요. 앞으로는 음식 먹을 때마다 농부들의 근심 어린 얼굴이 떠오를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농촌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들이 하나 둘 늘 때마다 우리 농민들 얼굴에도 웃음꽃이 조금씩 필겁니다."

소수서원의 우중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은 차창을 때리는 빗방울보다 더 많은 희망으로 훈훈하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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