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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창] 호의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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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챙겨주는 팔순 원앙 커플

언제나처럼 짐짓 새침한 미소를 머금고서, 영감님의 부축을 받으시면서 진료실로 들어서신다. "아이고~ 영감님 정성이 여전하시네요"라는 뻔한 인사에, "아이고~ 성가셔, 아주 죽겠어요"라며 할머니가 투정 반에 자랑 반의 속보이는 푸념으로 받으신다. "달리 편찮으신 데는 없으십니까?"라는 역시나 같은 질문에, "아이고~ 늘 그렇지요, 뭘···" 이라는 늘 그런 대답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영감님의 곰살궂은 일상 동정 및 병세 보고가 어김없이 미주알고주알 이어진다. "아이고~ 뭔 주책없이···"라는 할머니의 세 번째 '아이고~' 타령과 함께 다시 한 번 더 민망스러움과 안도감이 버무려진 눈 흘김이 있고서야, 비로소 진찰이 시작된다. 한 살 터울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팔순을 넘기신 우리 동네 원앙 커플의 한결같으신 풍경이다.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영감님의 말씀처럼, 할머니는 당뇨와 고혈압에다가 관절통과 손발 저림 등으로 거동하시기에 무척 힘겨워하신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백내장 수술까지 받으셨단다. 젊은 시절 마도로스로서 넓은 세상을 훨훨 돌아다니다가 딸 부잣집의 여섯 자매를 다 떠나보내고, 이제는 병들고 지친 할머니와 달랑 두 분만 사시니, 적적하고 힘드시지 않으냐, 라고 은근히 여쭈어 보았다. 웬걸, 영감님은 할머니의 힘겨움을 함께 덜어 주지 못해 안타까울 뿐, 연방 스스로는 '호의호식'하며 그저 행복하기만 하시단다. 똑똑한 딸내미, 돈 잘 버는 딸내미에다 야무진 딸내미 등 다섯 손가락으로도 채 담지 못하는 딸네들이 매달 추렴하여 용돈도 챙겨주고, 비록 뿔뿔이 흩어져 살고들 있지만 때맞추어 찾아와서는 냉장고에다 맛난 먹을거리도 챙겨 준다며 신바람을 내신다. 근래에 비행기 타고서 해외여행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다녀오셨단다. 그리고 참 신통방통한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할 텐데도 꼬박꼬박 세 끼 더운밥을 챙겨 주니, 이게 늘그막에 웬 호강이냐고 말이다. 할머니의 은근한 타박을 받고서야, 병원 문을 나서는 영감님의 뒷모습까지 싱글벙글 이시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참 많이 불행한 사람들을 자주 만나곤 한다. 또 '아직도 부족한 2%를 마저 채워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욕망을 부추기며, 너무 쉽게 행복해 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세상을 물끄러미 뒤돌아보고는 한다. 그리고는 그 영감님이 입에 붙이고 사시는 '호의호식(好衣好食)' - 등 따습고 배부르다, 라는 글귀 너머의 뜻을 새삼스럽게 되새겨 본다. 아직도 스스로에게 남아 있는 절반의 몫에 감사하고, 또 스스로가 상대의 부족한 절반의 몫을 채워 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해 하는 참 맹한 셈법을 말이다. 점심 먹고서 돌아오는 길, 저만치 두 분이 나란히 손을 잡고 가신다. 그냥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를 부축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은 그것이 은근한 사랑놀이요, 넉넉한 포옹인 셈이다. 아직도 된바람 매섭게 부는 날, '호의호식' 영감님과 '호호' 할멈이 나란히 가시는 길에는 봄이 채 오지도 않았건만 언제나처럼 봄기운으로 훈훈하다.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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