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감 후] 범의 아가리(虎口)

요즘 국제 외교 무대에서 한국이 겪고 있는 상황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쇠고기 협상, 북핵 문제, 금강산 피격, 독도 문제 등 현안마다 우리 정부가 치밀한 계산 없이 즉흥적인 외교를 펴다 보니, 내어줄 것 다 주고도 주변국들로부터 무시를 받거나 왕따를 당하고 국민들의 자존심도 구겨집니다. '글로벌 호구'라는 자조적인 표현마저 등장하더군요.

'호구'(虎口)란 하도 어수룩해 이용하기 좋은, 만만한 사람을 이르는 표현입니다. '범의 아가리'라는 뜻으로, 바둑에서 유래된 말이지요. 상대방 바둑알 석 점이 이미 포위하고 있어 입을 벌린 모양새가 호랑이 아가리 같다 해서 그런 말이 붙여졌지요. 그 속에 바둑돌을 놓으면 영락없이 먹히는 신세가 됩니다.

호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경우가 또 있습니다. 자산 투자가 그것입니다. 투자라는 우아한 표현으로 분칠돼 있지만, 냉혹하게 말하자면 자산 시장이라는 곳은 내 자산 비싸게 사 주는 호구를 찾는 총성 없는 전쟁터입니다.

대구의 대표적인 기업 A사의 주가가 IMF 외환 위기 직후 800원대까지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 회사 출신으로서 금융계에 진출해 CEO까지 오른 L씨는 A사의 창업자에게 당시 이런 권유를 합니다. "회장님, 회사에 유동성 위기 등 문제가 없지요?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회사 주식을 싸게 살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창업자는 끝내 자기 회사 주식을 사지 못합니다. 주가가 더 떨어질까봐 겁이 났다는 것이지요. L씨의 예측대로 이 회사의 주식은 이후 몇달 만에 무려 10배나 뛰어오릅니다. L씨와 L씨의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큰 돈을 벌었다고 하더군요.

주식이건, 부동산이건 바닥권에서는 비싸 보이고, 천정권에서는 싸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회사 사정을 가장 잘 안다는 그 창업자조차 주가가 더 빠질 것만 같은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셈이지요.

어째서 사람들은 불황의 최저점에서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자산을 투매하고, 호황의 정점에서 추격 매수에 나서는 등 주기적인 오류에 빠질까요. 프레드릭 래빙턴은 '연못 위의 스케이트'라는 이론을 통해 이를 절묘하게 설명해냅니다.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얼음이 깨질 확률은 높다. 그러나 연못 위의 사람 수가 많아지면 사람들은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안전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갖게 된다. 신뢰가 감염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게 되면, 이 같은 믿음은 순식간에 공포로 바뀐다. 연못은 서로 빠져나가겠다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해진다.'

자산 투자에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공포와 탐욕에 휘말리지 않아야 하는데 어지간한 식견과 마음가짐으로는, 시장과 반대로 가는 선택을 하고 맙니다. 투자분석가 '시골의사' 박경철씨는 부자의 정의를 두고 "돈을 더 불리려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아마 이 세상에는 도인 말고 부자란 없을 겁니다. 적어도 남들이 모르는 절정의 분석기법을 알고 있거나 세계 경제에 대한 깊은 혜안이 없다면, 우직함이 자산 투자 성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듯합니다. 이번 주 주말판에는 '자산 투자 덫에 빠진 개미들'이라는 주제를 다뤄봤습니다. 편안한 주말 되십시오.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