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니아와 함께 떠나는 세계여행]일본 후쿠오카의 오후 7시

하루를 마감하는 포장마차, 짧고 아쉬운 행복

일본 규슈현의 항구도시 후쿠오카, 부산에서 제트선을 타면 3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9월 중순이기는 하지만 대낮의 날씨는 아직 한여름처럼 뜨겁다. 대신 밤이 시작되면 선선한 바닷바람이 금세 도시의 뜨거운 공기를 몰아낸다. 우리는 매일 정오가 지날 때까지 늦잠을 자고 해가 조금 물러난다 싶을 때 천천히 호텔방을 기어나온다. 여행을 가서 구경도 안 하고 뭐 하는 건가 싶지만 말이다…. 후쿠오카의 하이라이트는 오후 7시부터 시작되니 괜찮다.

오후 7시, 드디어 후쿠오카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빨간색 등이 밝혀진다. 빨간등은 후쿠오카의 골목마다 숨어있는 작은 술집들과 강변에 늘어선 포장마차들이 손님을 받는다는 표시이다. 낮동안 한산했던 거리는 금세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 후쿠오카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나 싶어 새삼 놀라게 된다. 여행은 낯선 도시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부대낌이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여행은 밤이 돼서야 제대로 시작되는 셈이다.

포장마차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는 모퉁이를 돌기도 전에 알 수 있다. 해물이나 고기, 야채와 함께 간장소스를 쳐서 면을 볶아내는 야키소바, 돼지뼈를 오랜 시간 고아서 우려낸 진한 육수에 삶은 달걀, 삶은 돼지고기, 파를 얹은 후쿠오카 특산 돈코츠라멘, 그리고 포장마차마다 모양도 맛도 제각각 다른 삶은 어묵들이 길 건너편까지 맛있는 냄새를 풍긴다. 그 곳에 닿기도 전에 식욕을 자극당한 우리는 걸음이 빨라진다. 시원한 맥주 한 잔과 함께 먹는 라멘맛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하지만 막상 포장마차에 닿으면 빈자리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 기다리는 동안 입안에 고인 군침을 삼키는 일이 몹시 괴롭다. 게다가 드디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라멘 그릇을 받고 잠시 행복하다 싶으면 곧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신경쓰여 서둘러 먹고 물러나야 한다. 포장마차의 행복은 늘 짧고 아쉽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2차 코스가 있다. 꼬치구이와 생맥주를 먹을 수 있는 작은 술집이다. 우리는 4박5일 동안 매일밤 호텔옆의 작은 술집을 들렀다. 첫날 밤 11시가 넘어 찾아간 그 곳에는 4,50대 일본인 아저씨들이 떠들썩하게 사케(쌀로 빚은 일본식 청주)를 마시고 있었다. 중년의 아저씨들이 주로 찾는 곳인가 보았다. 50대를 훌쩍 넘긴, 작은 키에 정수리가 불빛에 반들거리는 대머리의 인상 좋은 주인장 아저씨 혼자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로 우리를 맞았다. 네모나게 썬 양배추에 간장소스를 친 샐러드가 기본 안주인가 보았다. 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우리는 일본어로 되어있는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알만한 한자를 찾아내려 애썼다.

"칸코쿠진데쓰(한국인입니다)!" 우리는 일본말로 계속 무얼 시킬 것인지를 물어오는 주인장 아저씨께 우선 한국인임을 밝히기로 했다. 아저씨는 난감한 표정으로 반들반들한 대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내온다. 삼겹살 꼬치였다. "하이! 하이!(네! 네!)" 친구가 환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아저씨는 기뻐하며 삼겹살 꼬치를 숯불에 올렸다. 삼겹살은 금세 지글지글 익기 시작했다. 5평 남짓 되어보이는 작은 술집의 한쪽 벽에는 손님들 이름이 쓰인 커다란 사케병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우리가 앉은 바(BAR)에는 닭고기, 새우, 생선, 버섯 같은 꼬치구이 메뉴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벽과 천장에는 오래된 일본식 그림과 시골할머니네 집에 걸려있을 것 같은 달력과 시계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그리고 구슬픈 엔카(일본식 트로트 음악)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혼자서도 저녁 퇴근길에 잠시 들러 술 한 잔 하고 가기에 딱 좋은 분위기이다.

작지만 오래된 역사가 느껴지는 술집이 정겨웠다. 대머리 주인장 아저씨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곳에서 저녁마다 이 작은 술집을 열어온 것일까. 다음날 밤 다시 우리가 들렀을 때 아저씨는 귀여운 대머리를 벅벅 긁으며 짧은 영어단어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아는 영어는 겨우 "베리 굿!", "에어플레인?", "트레블?" 정도였지만 신기하게도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아저씨가 한국 드라마 '대장금'과 '서동요'를 매우 재미있게 봤다는 것, 그리고 한국 여배우 이영애의 팬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아저씨는 우리가 이틀 후에 여행을 끝내고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 날, 우리가 내일이면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아저씨는 문닫을 시간이 지나 빨간등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손을 저으며 서비스 안주와 술을 내주었다. 내 것과 남의 것에 "얄짤없다"는 일본에서 서비스 안주를 받다니, 우리는 몹시 감격했다. "베리 굿! 베리 굿!" 우리는 아저씨가 아는 영어와 우리가 아는 일본어를 총동원해서 최선을 다해 아저씨의 요리솜씨를 칭찬했다. 밤이 깊도록 아저씨는 또 좋아하는 이영애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미노(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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