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누구나 외롭다. 생전 와닿지 않던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철이 들면서 결혼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새삼 뼈저리게 느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비슷한 무리를 찾는다. 피를 나눈 형제가 될 수도 있고, 이웃이나 직장 동료가 될 수도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치며 부대끼는 이웃이나 직장 동료가 일년에 서너번 볼까말까 한 형제나 친척보다 낫다는 사람도 많다. 반면 '아무리 친구가 좋아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혈족의 소중함을 부르짖는 사람도 있고, 또 여기에 반박해 '피는 술보다 묽다'며 술 한잔 기울이며 동고동락하는 직장 동료의 중요성을 강변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이 변하며 친구도 변한다. 진정한 친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멀리 있는 가족보다 가까운 친구
유난히 짧았던 지난 추석 연휴. 서울에 사는 권정욱(37)씨는 오랜 만에 대구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뵙게 됐다. 하지만 추석 전날 대구로 온 권씨가 집에 머문 시간은 추석 점심 무렵까지. 오후에 잠시 처가에 들러서 저녁을 먹고는 곧바로 부부 동반으로 시내에서 친구들을 만나 함께 영화를 봤다. 다시 세 부부는 얼마 전 결혼한 친구 신혼집에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연휴 마지막날 부모님 댁에 잠시 들러 인사를 한 뒤 바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명절이라고 친척들끼리 모여봐야 서먹서먹하기만 하고 나눌 이야기도 별로 없잖아요. 사실 늘 오고가는 안부나 묻고 쓸데없는 정치 이야기하다가 경제가 어렵다면서 한숨이나 쉬는 것뿐이죠. 어차피 명절 오후가 되면 처가로 간다고 뿔뿔이 흩어지는데 굳이 남아있을 필요도 없고. 친구들을 만나는 게 훨씬 속 편하고 재밌어요."
주부 최모(38)씨는 전화기를 붙들었다 하면 1시간은 기본이다. 2, 3일에 한번씩은 통화를 하지만 매번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면 아쉬움에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할 정도다. "자녀 나이가 비슷하다 보니 공감할 소재도 많고 같은 환경에 처해있다 보니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속내를 읽어낼 수 있죠. 부모님이나 피를 나눈 형제도 좋지만 아무래도 자주 만날 수 없다 보니 소소한 이야깃거리는 많지 않습니다. 때로는 친구가 형제, 자매보다 훨씬 살아가는 데 도움도 되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직장인 이모(34)씨는 친구 때문에 아직 장가갈 생각을 않고 있다. 함께하는 친구 모임만 얼추 5개가 넘는다. 매달 회비 나가는 돈만 해도 20만~30만원에 이르지만 아깝다거나 불필요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결혼한 친구들도 있지만 아내와 자녀, 고부 간 갈등 등으로 고민하는 것을 보면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할 수 있다면 친구들끼리 모여 사는 것도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얽히고 설킬 필요도 없고 상대방을 존중해주면서 적당히 받아주기도 하고. 나이가 들다 보니 부모님 모시는 문제나 재산 때문에 형제간에 갈등도 많은데 친구는 그런 게 없잖아요. 멀리 있는 사촌 형제보다 친구가 백번 낫고, 보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더욱 조심해야 할 사이
은행원 이모(40)씨는 얼마 전부터 동창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동창회라고 해야 절친한 친구들 몇 명이 모이는게 전부. 사회 생활 시작한 지 10년 만에 만난 고교 친구들은 정말 반가웠다. 아내와의 사이도 시들해질 무렵 다시 어울리게 된 친구들은 한달에 한번 보는 게 아쉬울 정도. 하지만 돈 문제 때문에 사이는 틀어지고 말았다. 별 일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씨는 속이 몹시 상했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넨 말일 수도 있지만 늘 모임 때마다 "요즘 은행이 잘나간다는데 네가 한번 쏴라. 은행원 친구 덕 좀 보자"며 은근히 부담을 주는 바람에 조금씩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두어번은 제가 계산했죠. 물론 돈을 모아서 내기도 하지만 사실 남자들끼리 모여서 돈 거두는 것도 꼴불견이잖아요. 형편이 어렵겠거니 하고 지갑을 꺼내드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는 겁니다. 마치 호구가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친구들이 다 그런 건 아니고 한두명이 바람을 잡죠. 친구도 주머니 사정이 비슷해야 어울리겠구나 싶더군요."
이웃 사촌으로 만나 친구가 된 황모씨와 배모씨. 하루가 멀다 하고 가족끼리 모여 함께 저녁도 먹고, 밤 늦게까지 TV를 보고, 주말이면 이곳저곳 안 가본 데가 없을 만큼 붙어다녔다. 주위 사람들은 형제도 저만큼 친하지 못할 거라며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바라봤다. 사는 형편도 비슷했고, 자녀들도 비슷한 또래여서 어울릴 때마다 '이런 게 바로 이웃 사촌이구나'하고 새삼 고마워할 정도. 하지만 그런 사이도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친한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 가족들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훤히 알다 보니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사건건 간섭하는 사이가 됐다. "너무 편한 사이가 되고 나니 오히려 불편해졌습니다. 사생활이 없어진 셈이죠. 처음에는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서로 의견이 다를 때엔 오히려 부담이 됐습니다. 알아도 모른 척할 필요가 있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직장동료와 친구 사이의 관계
현대인들이 가장 편하고 쉽게 만날 수 있는 친구는 아무래도 이웃보다는 직장 동료다. 동성이건 이성이건 워낙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의 장단점과 고민을 알 수 있고, 때문에 누구보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 실제로 온라인 리크루팅 업체 잡코리아가 직장인 373명을 대상으로 '연봉관련 고민 상담 대상' 설문을 한 결과, 직장인 4명 중 1명은 본인의 연봉고민 상담을 친구와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최근 직장인 805명을 대상으로 술자리와 문화생활 조사를 한 결과, 문화생활을 함께 즐기는 상대로 친구와 직장 동료가 가장 많았고, 특히 술자리를 함께 하는 상대로는 직장동료가 71.2%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직장 동료는 정말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최근 취업포털 커리어가 이직 경험이 있는 직장인 8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6%가 이전 직장 동료와 현재 친분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로 '정이 많이 들어서'라는 답이 71.6%로 가장 많았지만 '업무적 도움'(49%), '이전 직장에 대한 정보 때문'(20%)도 적잖은 비중을 차지했다. 아울러 이전 직장 동료가 업무나 이직 등에 도움이 됐다는 답도 65%를 넘었다. 함께 지낼 때는 '정' 때문에, 떠나서는 '이익관계' 때문에 만난다는 것.
회사원 황모(35)씨는 "재직 중에는 회사 동료와 친구를 딱히 구분하기 어렵지만 퇴사한 뒤 관계를 생각하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며 "솔직히 사회생활하면서 기왕이면 도움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기 때문에 이래저래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함께 일할 때에는 간이라도 떼어줄 듯 지내다가 퇴사한 뒤 별 볼일 없어지면 언제 봤냐는 듯이 쌀쌀맞게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한국 직장인 7명 중 1명은 직장에 '절친한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LG경제연구원이 20~50대 직장인 359명을 설문조사한 '우리나라 직장 내 프렌드십 진단' 보고서 결과다. 한국 직장인의 평균 사내(社內) 친구는 2.56명. 절친한 동료가 몇 명인지를 묻는 질문에 2명이라고 답한 비율이 27.6%로 가장 많았고, '한 명도 없다'도 13.1%나 됐다. '한국 회사의 조직문화는 끈끈하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도 큰 차이를 보였다. 한국의 '직장 내 프렌드십' 정도도 100점 만점에 52.4점에 그쳤다.
그래서인지 이혼처럼 개인적인 신상의 변화를 의논하는 상대로 친구와 부모를 꼽는 사람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한 재혼전문 정보회사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이혼여부를 결정할 때 남성들은 '친구'(32.4%)와, 여성은 '부모'(29.0%)와 상의하는 비중이 가장 높았다. 공무원 안모(37)씨는 "아무리 절친하게 지내는 직장동료라고 해도 이혼은 숨기고 싶은 약점이나 비밀"이라며 "특히 이혼까지 가는 과정에서 복잡한 가정 문제나 불화 내용까지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은 단짝 친구나 형제 정도가 아니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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