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속 예술 산책] '탱고'가 숨쉬는 영화

▲ 일포스티노
▲ 일포스티노
▲ 카운터 페이퍼
▲ 카운터 페이퍼

춤은 영혼의 표현이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분노와 슬픔, 뜨거움과 사랑 등 온갖 감정들이 가장 원시적이지만 근사한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 춤이다. 고전 사교춤을 비롯해 폭스 트로트, 자이브 등 많은 춤이 있지만, 그래도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탱고다.

'따라라 딴 따 딴! 딴! 딴! 따.' 단순한 음이 반복되는 가운데, 서로 쳐다보듯 말듯, 앞뒤로 꺾이고 채고, 밀고 당기는, 어떻게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춤이다. 1880년대 남미에서 처음 생겨난 탱고는 초창기에는 상당히 외설스러운 춤으로 알려졌다. 남녀가 손을 잡고 서로의 가랑이 사이에 다리를 끼우고 밀고 당기는 것이 흡사 섹스의 동작을 연상시킨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등장하는 탱고도 욕망의 또 다른 이름으로 그려진다.

지난해 개봉된 독일 영화 '카운터페이터'에서 마지막 해변에서 추는 탱고는 가장 슬픈 욕망의 변주였다. 2차 대전 중 독일은 역사상 최대의 위조지폐 작전을 꾸민다. 솜씨 좋은 유태인 인쇄공들을 모아 수용소에서 영국 파운드화와 미국 달러화를 찍어내려는 음모였다. 인쇄공들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도구로 전락해 나치에 부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 '위조의 제왕'이라 불리던 소로비치(카알 마르코빅스)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동료들의 죽음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평생을 편히 살 수 있는 돈을 카지노에서 다 날린 후 그는 해변에서 여인과 탱고를 춘다. 여기서 탱고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한 남자의 우울한 초상을 역설적이면서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살기 위해 나치에 협력한 서글픈 생존 본능이 욕망의 춤에 녹아들면서 묘한 회한이 밀려드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정서를 선사하는 것이 알 파치노 주연의 '여인의 향기'라는 영화다. 엘리트 장교인 프랭크(알 파치노)는 어느 날 장님이 된다. 군인으로서 생명도 끝나고, 삶의 의욕도 없다. 그는 생을 마감하는 것만이 이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막 자살 여행을 떠난다.

우연히 클럽에 들렀다가, 옆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젊은 여인(가브리엘 앤워)에게 춤을 신청한다. 지팡이 없이는 잘 걷지도 못하지만, 그는 무대에서 멋진 탱고를 춘다. 춤을 추는 순간에는 눈이 필요가 없다. 온몸의 감각으로 추기 때문이다.

이때 나온 곡이 카를로스 가르델의 'Por Una Cabeza'란 곡이다. 영화에서는 매혹적인 선율만 나왔지만, 가사가 있는 버전에서는 경마로 재산을 탕진한 한 도박꾼의 비참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제목도 '간발의 차이'라는 뜻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프랭크, 찰나의 순간에 갈라놓는 절망과 삶의 의욕이 탱고에 잘 묻어난다.

이 곡을 만든 카를로스 가르델도 1917년 첫 음반 '나의 슬픔의 밤'에 이어 히트곡을 내고, 1923년부터 1933년까지 화려한 활동을 했지만 결국 콜롬비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숨져 노래와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

탱고는 무엇보다 사랑의 춤이다. 아름다운 여인과 달콤한 샴페인을 마시며 추는 감미로운 열정의 춤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이탈리아에 망명 온 대시인 네루다가 즐겨 춘 것도 탱고다. 이탈리아 작은 섬의 우편 배달부가 망명 온 유명한 시인에게 편지를 전해주면서 순수한 자아와 시심(詩心)을 발견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우편 배달부로 나온 마리오(마시모 트로이지)가 시를 배우고 싶었던 것은 시쳇말로 여자를 '꼬시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했기에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그에게 우편물을 보낼까. 네루다의 '비결'(?)을 알고 싶어 찾은 것이 시였다. 그러나 그가 정작 모른 것은 탱고였다.

어느 날 우편물을 전하러 갔다가 네루다가 여인과 함께 아름답게 탱고를 추는 모습을 보면서 넋이 나간다.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해변가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추는 네루다의 탱고는 삶의 여유와 사랑의 밀어(密語)가 어우러진 낭만적인 춤이었다.

반면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마론 브란도가 그렇게 추고 싶어한 탱고는 한 스텝, 한 스텝마다 외로움이 철철 묻어나는 절대 고독의 춤이었다.

아내의 자살로 삶의 의욕을 상실한 한 중년 남자가 빈 아파트에서 젊은 여자를 만난다.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둘은 정사를 나눈다. 사랑도 삶도, 고통도 존재도 섹스 속에서만 이뤄진다. 어느 날 자신의 속에 그녀가 들어와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때부터 여자는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여자를 쫓아 술을 마시고 탱고 무도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가 원했던 것은 관능과 절도 있는 탱고였지만, 한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만취한 채 비틀거리며 춘 춤은 그의 마지막 춤이었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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