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곳곳을 200여 차례나 踏破(답파)한 어느 지인의 안내를 받아 지난 일요일 지리산을 다녀왔다. 회사 동료와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들까지 어울린 즐거운 산행이었다. 이번 등반 코스는 처음 가보는 길이었다. 정상인 천왕봉을 오르거나 주능선을 종주하는 많이 알려지고, 익숙한 길이 아니라 지리산을 멀찍이 바라보며 걷는 코스였다.
얼추 다섯 시간에 걸쳐 10여㎞를 걸었다. 천왕봉을 중심으로 북서쪽 능선을 걷는 이 코스는 일곱 산사와 암자를 둘러보는 게 보통이지만 시간이 없어 네 곳만 들렀다. 그런데도 그 매력에 흠뻑 젖어들었다. 홀로 암자를 지키며 수행하는 노스님의 말씀을 통해 새삼 삶의 참뜻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사찰이나 암자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일품이었다.
등산을 할 때마다 머리에 처음 떠오르는 것은 "왜 이 고생을 하며 산에 오를까" 하는 생각이다. 워밍업도 없이 곧장 가파른 길을 오르는 코스여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30분가량 걸었는데도 땀이 흘러내린다. 어김없이 다리는 무거워진다. 이럴 때면 항상 염두에 두는 생각이 있다. 값비싼 補藥(보약)을 먹는다고…. 그러면 다시 힘이 생겨난다. 세상사 모두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한 시간쯤 올랐을까. 해발 1,000m에 이르는 한 전망대에 서니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는 반야봉, 왼쪽으로는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그 사이로 벽소령, 세석평전 등 지리산 주능선과 백무동과 같은 계곡들도 보인다. 一望無際(일망무제)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피로가 순식간에 가신다.
너무 가까이 가면 미처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떨 때엔 멀찍이 떨어져야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장쾌하게 펼쳐진 지리산 주능선을 보면서 숲은 보지 못한 채 나무만 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가를 잠깐 고민해 봤다.
4월의 지리산은 참으로 아름답다. 지난밤에 내린 눈으로 봉우리와 능선은 하얀 모자를 썼다. 봄과 겨울, 두 계절이 공존하고 있다. 산 밑에서 시작한 푸릇푸릇한 새 잎의 물결은 5, 6부 능선까지만 올라왔다. 그 위에 있는 나뭇가지엔 아직 물이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계절의 흐름 앞에는 지리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지리산이 신록으로 뒤덮일 것이다. 억겁의 세월을 산 지리산도 그럴진대 하물며 100년 안팎의 짧은 삶을 사는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앙탈을 부리고 역행하려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산이 인간에게 주는 기쁨과 행복은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치유 능력이다. 산을 찾은 이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상처를 아물게 해준다. 지리산도 그 넉넉한 품으로 세파에 찌든 사람들을 푸근하게 안아주며 심신을 달래줬다. 국토의 母山(모산)이란 말 그대로 그 품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지리산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기회도 안겨준다. 지나온 삶을 復碁(복기)하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얼마나 진지하고 참되게 살았는지를 되돌아봤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지만 仁(인)자를 忍(인)자로 바꿔도 큰 허물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묵묵히 고통을 참고 한발 한발 오르는 사람에게 산은 기쁨과 환희를 안겨주는 법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휙 하니 정상에 오르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기쁨은 옅을 수밖에 없다. 가이드를 맡은 지인은 산을 인생의 축소판에 비유했다. 다들 정상에 오르려 하지만 정상은 오래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는 곳이라는 얘기였다. 권력, 돈을 좇아 정상에 선 사람들은 그것이 영원한 걸로 안다. 착각이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법을 몰라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 아닌가.
산에서 내려오는 길, 지리산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렇지만, 그 침묵으로 사람들에게 수많은 삶의 진리를 던져준다. 어둑어둑해진 지리산은 사람들의 어깨를 감싸며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지 말고 꿋꿋이 살라고 한다. 억겁의 세월, 지리산은 모진 비바람에 깎이고 파이면서도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에 온기를 전하는 삶을 살아가련다. 저 지리산처럼.
李大現(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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