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피플&피플]녹색환경연합 중앙회 고문 이경희 박사

파란만장한 내 인생 "나이는 숫자일 뿐이죠"

해방을 전후한 좌'우익의 대립, 독재와 민주화 운동 등 한국의 근'현대사는 굴곡의 역사였다. 이 역사의 소용돌이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은 이경희(70'녹색환경연합 중앙회 고문) 박사.

처음 받은 명함 뒷면엔 통일부 교육위원, 민주평통 자문위원, 한국자유총연맹 전문교수, 대한노인회 중앙회 지도교수 등 현재 활동이력이 빼곡이 새겨져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다. 고희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잖은 사회활동을 정열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는 1939년 일본서 태어나 광복과 더불어 한국으로 돌아와 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한국말이 서툴러 급우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3년이나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대신 집에서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워 한학에는 남에게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2'28 주역이기도 했던 그는 경북대 의대에 입학하면서 인생의 소용돌이는 시작됐다. 당시 경북대 의대 재학중이던 그는 간첩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인혁당, 남민전, 민청학련 등 역사적 사실이 지금에 와서는 조작됐다고 밝혀졌지만 당시만 해도 서슬퍼른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의대 학생회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간첩사건 연루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다. 그 고문의 후유증은 아직도 그의 팔, 다리에 흰 반점이 생기는 등 생채기로 남아 있다. 결국 7개월간의 구속 끝에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당시 상황에선 복학은커녕 퇴학처분을 당하게 된다. 전도양양한 의학도로서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는 당시 정권에 불평하지 않았다. 권력자의 추종세력이 출세의 징검다리로 삼았다고 자위한다.

그의 의학도로서의 꿈은 미국 유타주립대로 유학가면서 반전된다. 당시 유타주립대는 의학부가 없어 사회학을 전공, 1966년 박사학위를 따면서 사회운동가로 변신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간첩사건 연루라는 전과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제도권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으며 늘 아웃사이더였을 뿐이다. 취직을 하거나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던 중 당시 이만섭 공화당 원내 부총무의 소개로 청와대로 들어가면서 다시 한번 인생의 아이러니를 맞는다. 청와대 사정담당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자신에게 인생의 타격을 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근에서 모시게 된다. 청와대 사정담당 비서실 근무시 에피소드는 박 전 대통령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한번은 박 대통령이 "자네와 나는 어떤 관계이냐?"고 묻기에 그 이유를 모른 채 의례적인 답변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 전 대통령 모친의 이름과 그의 모친의 이름이 한글과 한자까지 똑같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모친 이름과 그의 어머니 이름이 같다는 인연을 계기로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친근하게 느끼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겪는다. 그 후 그는 박 전 대통령 추모식 때면 어김없이 가족석에 앉아 고인의 뜻을 기린다.

역사는 진화한다. 어제의 이념과 사상이 오늘과 다르듯 내일의 역사는 다시 쓰여질 뿐이다.

전수영기자 poi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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