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성로는 대구읍성의 북쪽 성벽을 헐고 낸 신작로이다. 지역 최초로 포장된 도로였을 뿐만 아니라 북쪽에 경부선 철로가 나면서 제일 먼저 일본 사람들이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한 도로이기도 했다. 읍성시대의 공북문(拱北門)은 북성로에 있었다. 북쪽의 임금을 향해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를 가진 문으로 대안성당 북쪽의 두 길이 모여들어 북성로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선아산업사 서쪽 골목에 표지석이 놓여 있다.
대구읍성 허물기는 북성로 쪽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서성로'남성로'동성로 순으로 성벽을 허물었으며, 성벽을 허물고 난 북성로는 자연스레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대구 최고의 백화점이었던 미나카이(三中井) 오복점, 대구곡물회사, 목재회사, 조경회사, 장신구점 등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상점이 들어섰다. 그 가운데서도 미나카이 오복점은 성씨가 같은 세 사람의 일본인들이 동업 형태로 운영하였는데, 동업자 가운데 중심인물이었던 나카에는 일본인 거류민회 초대 회원이었을 뿐 아니라 금융업을 기반으로 비료와 석탄사업을 했다. 미나카이는 5층 건물로 대구에서는 최초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엘리베이터를 타보려고 밀려드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또 대안동에 골목시장(지금의 중앙시장)과 북문 앞에서 어채(魚菜)시장이 매일 열렸다. 이곳은 식당'영화관'여관이 들어섰던 향촌동과 맞닿아 있어서 당시에는 최고의 번화가였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었다.
백조다방은 음악인들의 사교장이었다.'백조'라는 이름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에 나오는 백조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이삼근이 주인이었다. 그는 지팡이'베레모'빨간 스카프로 치장하고 다니던 화제의 인물이었다. 또한 상업적인 다방과는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주인의 음악적 취향과 함께 당시로서는 명물이었던 그랜드 피아노가 있어서 향토 음악인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향토의 1세대 음악가인 권태호를 비롯한 김진균'윤용하 같은 음악가들의 연습공간으로 애용되기도 했다.
6'25전쟁 시절, 북성로와 향촌동 일원에 이름난 다방이 많이 있었다. 모나미'청포도'백조'백록'호수'꽃자리 같은 다방이었다. 그 가운데 모나미다방은 문인들이 즐겨 찾던 곳. 해방직후 '죽순문학회' 주관으로 이효상 시인의 출판기념회가 두 번이나 열렸던 곳이자 공초 오상순을 비롯한 피란문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꽃자리다방은 구상 시인의 시집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곳이고, 청포도다방의 이름은 육사의 '청포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야말로 피란문인들의 쉼터이자 향수가 깃든 거리라 하겠다.
1966년 도청이 산격동으로 이전하자 주변 상권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 산업공구 골목으로 발전하였으나 주차공간이 부족할 뿐더러 차량 통행에도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검단동에 유통단지를 조성하여 이전을 유도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여전히 '길거리 공구백화점'으로 향하고 있다. 다들 익숙해서 좋아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오늘의 모습을 고집한다면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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