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병실에서

최근 들어 병실 회진을 하다 보면 처음에 낯설어 보였던 간병인이 이제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점점 많이 보인다. 옛날 우리 나라 유교 문화에서 부모나 가족의 간호를 남에게 맡기지 않고 반드시 자식이나 가족 중 누군가가 병 뒷바라지를 해야 된다는 인식이 강해 생면부지의 남의 손에 내 가족을 맡긴다는 것은 불효고 남들에게도 손가락질 받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핵가족, 맞벌이 혹은 부모자식 간 타지역 주거 등등의 이유로 요새는 당당하게 이분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환자가 중환일수록 의사 입장에서는 어설픈 보호자보다 일정 간병 교육을 받은 간병인들이 더 믿음이 갈 때도 있다. 이런 간병인 제도처럼 의료 환경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이 바뀌어가고 환자를 따라오는 보호자의 모습도 세월에 따라 많이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된다.

내가 처음 병원에 수련의로 있을 1980년대 말 당시만 해도 가족의 경제력이 가장에 집중되어 있어 그 가족의 가장이 그 가족의 운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집안의 유일한 수입원인 가장이 치명적인 질병으로 사망하거나 장기간 입원 등으로 경제 행위를 할 수 없게 되면 그 가족은 엄청난 경제적 시련을 겪기 때문에 가족들은 사력을 다해서 가장을 간호하는 것이 그 당시는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효자, 효녀들을 자주 볼 수 있었고 어떤 때는 너무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는지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틋한 가족애를 느끼게 하는 가족도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양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산업화 사회를 거치면서 일자리가 많이 늘어나고 또한 가계 지출도 많아져 가장 한 사람만으론 가계를 운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현재는 가족 구성원 누구나 직장을 가지는 것이 당연시되고 이로 인해 가장에게 집중되었던 경제 집중력도 점점 분산되는 만큼 가장의 가족 내 비중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가족 구성원들의 경제적 독립 현상인지는 몰라도 요새 가장이나 부모가 중병에 걸렸다고 하면 옛날처럼 가장에 대한 정과 '이제는 어떻게 돈 벌어 먹고사나' 하는 현실적인 문제로 울고불고하는 자식들은 볼 수가 없고 그저 '얼마나 더 살 수 있냐?'는 질문이 전부다. 그것도 환자 앞에서…. 즉, 부모 중 누가 중병에 걸려도 크게 답답해하는 자식들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병에 걸리면 가장 불쌍한 사람은 환자 본인이고 그 다음으로 불행한 사람은 그 배우자라는 생각이 요새 자꾸 든다. 그러나 이것도 환자가 보험에 가입되어있다면 상황이 또 달라진다. 얼마 전 간암으로 사망한 환자의 부인이 사망 진단서를 받으러 내게 오면서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고 물어봤더니 그 아주머니 왈, 남편이 사망하면서 3군데 보험 회사에서 생각지도 않은 돈이 많이 나와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였다.

김성국 경북대 병원 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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