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우리의 슬프고 답답한 교육 현실

몇 해 전 일이다. 큰아이의 학급에 ADHD, 즉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증 장애 아이가 하나 있었다. 수업 중 혼자서 자리에서 나와 걸어다니질 않나, 갑자기 큰 소리를 내지를 않나 하여튼 학급에서 큰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그 아이의 행동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담임교사의 대처 방식이었다. 그는 아이에 대해 엄한 체벌로 다스리려 했다. 말이 체벌이었지, 그것은 적나라한 폭력 행사였다. 우리 아이가 집에 와서 그 아이에게 가해지는, 점점 심해지는 가혹한 체벌의 모습을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서늘하게 저며 들었다. 슬펐다. 불쌍한 그 아이는 1년 내내 한 번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압도적인 지위에서 행해지는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 어린 영혼은 그 자신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에 굴복하며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인가?

이 예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문제를 끄집어낼 수 있다. 우선 그 아이가 가진 장애는 선천적인 것으로, 뒤숭숭한 그의 행동에 대해 우리가 어떤 비난도 가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 아이에게는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따뜻하게 감싸주는 애정이 필요하고, 또 그 아이에 맞춘 교육 과정이 별도로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와 같은 배려는 행해지지 않는다. 나아가 전체의 학습 질서를 깨는 아이로 낙인찍혀 잔인한 대가가 주어짐이 보통이다.

최근에 난독증 학생에 대한 처방을 하는 선구적이고 모범적인 학교 교육이 보도된 적이 있다. 서울의 어느 학교에서 시행된 일이다. 난독증 학생은 교사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웅얼웅얼하는 덩어리로 들리고, 책을 읽을 때는 글씨가 꿈틀거려 무슨 내용인지 잘 파악하기가 힘들다. 당연히 정상적인 학업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무려 15%의 학생들이 이 난독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난독증은 컴퓨터를 통한 시각훈련 프로그램, 청지각 훈련 기계를 통한 훈련을 거치면 월등한 교정 효과를 갖는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겨우 이 난독증을 향한 관심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 정도로 치부하며, 아이들의 잘못이 아닌 행동에도 그 아이들을 비난하여 왔다. 그들이 갖고 있는 선천적 장애 따위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 이 '야만의 시대'에서 벗어나 좀 더 현명하고 따뜻한 교육의 현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또 하나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를 제기해 본다. 그 교사는 학교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심한 알코올중독자였다. 술에 취해서 큰 대자로 교정에 누워 있는 등의 모습이 학생들에게 자주 목격되었다. 과도한 그의 폭력 의존증은 학생들로 하여금 언제나 벌벌 떨게 만들었다. 물론 아이들의 학습에 어떤 열의나 정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사표(師表)가 되는 훌륭한 선생님들도 우리 사회에는 많이 계신다. 우리는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들을 향해 진정으로 감사함과 존경의 마음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질서 속에는 교육에 전혀 보람과 긍지를 갖지 못하고, 또 교육자적 자질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이름만 교사인 불량 교사가 엄연히 존재한다.

불량의 정도가 너무 심해 적절한 재교육을 통한 교정이 불가능한 교원은 자신을 위해서나 무엇보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교사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 어떤 직역에서건 '철밥통'을 허용하지 않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교원평가제는 하루빨리 시행되어야 한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이를 뒤집지는 못한다. 제발, 우리 좀 정직해지고,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직시하도록 하자.

신평 경북대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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