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부](7)의성 금성 산운마을 영천이씨 황수석 여사

"삶이란 사리에 역행 말고 순리대로 사는 것"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하더니 하루 종일 날씨가 맑고 화창하다. 옛 조문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경덕왕릉과 금성산 고분군 그리고 문익점 면작 기념비를 지나니 저 멀리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으로 알려진 금성산이 나타났다.

주변 들녘에 곡식이 여물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풍경에 취해 가다 보니 어느새 금성산 수정계곡 아래 상서로운 구름이 감돈다는 산운(山雲)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의성군 금성면 산운마을은 450여년 전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이 처가곳인 이 마을로 입향해 민홍, 민성, 민환 형제를 낳았고 이들이 정착해 일파를 이루면서 영천이씨의 집성촌이 됐다.

산운마을에는 마을사람이 벼슬에 급제하면 심었다는 회나무가 집집마다 우거져 있고 점우당(漸于堂), 소우당(素于堂), 운곡당(雲谷堂), 학록정사(鶴麓精舍) 등 문화재가 있어 대감마을이라고도 불린다. 경정종택은 이곳 산운마을 입구의 첫번째에 위치해 마을을 찾는 손님들을 가장 먼저 반겨준다.

◆ 450년 세월 지켜온 종택

올해 77세의 황수석 종부가 입구에 나와 취재진을 맞이했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조금 현대식 건물이 나온다. 집 안에서 경정선생의 15대 손인 이영호(李永鎬) 종손과 황수석 종부를 만났다.

"우리 족보를 보면 학동 선조가 1531년생이신데 처가곳이 지금 이곳이었어. 평산신씨에게 장가드셔서 26, 7세에 입향을 했지. 금년이 450여년 되고 입향 행사를 준비 중이지"

종손 어르신의 집안 내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자니 수백여년 세월과 가문을 지탱해 온 경정종택의 무게감이 다가온다. 이 건물과 함께 가문의 내력과 가르침을 이어오고 있는 종손 어르신과 종부 황수석 여사에 대한 경외심이 가슴속으로 밀려온다.

◆ 종갓집에 태어났으니 종갓집으로 시집가야

황수석 여사는 울진군 기성면 사동에 위치한 해월헌에서 14대 종녀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일제강점기에 우체국장으로 계시던 아버지가 딸에게도 공부는 시키는 것이 좋다고 해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평해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아버지가 서울 왕십리 우체국장으로 발령 받으면서 모든 가족이 서울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중학교 5학년까지 공부하다가 해방되면서 평해로 다시 들어왔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해월헌 13대 종손이셨던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어 집안 형편이 조금 어려워지기도 했었다.

황수석 여사는 평해에 와서는 살림살이를 배우면서 살았다. 이른바 신부수업을 받은 것이다. 시간이 흘러 여사의 혼기가 차자 인근의 종갓집에서 혼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사는 당신이 종부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자신이 해월헌 종가의 맏종녀인데다가 어머니(본보 종부 해월헌 이차야 종부가 황수석 종부의 어머니이다)의 힘든 인생을 보고 자라면서 스스로 종부의 삶에 회의를 느꼈었기 때문이다.

"내가 종가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아는데 종갓집에 시집가고 싶었겠어요? 나이가 차니까 혼인말이 들어오는데 자꾸 종갓집이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무조건 거절했어요. 한국전쟁 이후니까 전쟁통에 교사가 모자랐는데 요즘 말로 고등학교 다녔으면 준교사시험 쳐서 교사가 될 수 있었어. 나는 할머니 몰래 원서 제출해놓고 그랬는데 간절했는데 하도 완고하셔서 그것도 못했고, 종갓집 안 가려고 단식투쟁도 했었어요."

완강하게 거절하니 이젠 마을 대소가의 어른들이 나섰다. 당시로서는 처녀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이 가문의 망신거리였기 때문이다.

"내하고 어머니는 종가에 시집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하늘은 높아서 못 보내고 땅은 낮아서 못 보낸다'고 종갓집에 태어났으니 종갓집에 시집가야 한다고 할머니가 완강하셨죠."

◆최전방부터 최남단까지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던 생활

신랑은 1958년 6월에 장교로 임관하고 이듬해인 1959년 1월에 황 여사와 결혼했다. 최전방부터 최남단까지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끝난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다. 부대 인근에 단칸방을 얻어 살았는데 집안에 가구라고는 사과 퀘짝에 커튼을 친 것이 전부였다. 어쩌다가 포탄상자를 포개어 만든 찬장이라도 생기면 너무 행복해 했을 정도였으니까. 군인 신분 탓에 남편은 문중이나 집안의 제사 참가도 어려웠다.

"그때는 교통도 안 좋고 멀리 있으니까 우리 시어머니가 성품이 좋아서 '내가 젊으니까 내가 하마. 애들 데리고 오려면 고생스럽다 오지마라'며 오지 못하게 했었어요"

남편의 직업상 이동이 잦아 애들도 전학을 자주 시켜야하니까 큰아이는 산운마을 시댁에 두고 학교를 시켰다. 나중에는 황 여사 혼자 1남 3녀를 모두 데리고 서울로 나와 살았다. 남편이 1976년에 소령으로 예편해 서울에서 은행에 근무하며 다시 합치게 되었다. 그 후 1991년 은행에서 퇴직하고 산운마을에 있는 경정종택으로 들어왔다.

◆ 새로 지은 경정종택에서 종부로

한국전쟁 당시 마을사람들이 영천으로 피란가서 마을을 보니 며칠 동안 연기가 치솟았다고 한다. 경정종택을 인민군이 연대본부로 활용했기 때문에 국군에서 포격을 했고, 몇 백년 된 고가옥이 잿더미가 됐다.

사당만큼은 타지 않고 남아있던 것이 그나마 다행. 이후 인근의 다른 고가옥을 뜯어와서 모양새를 갖추어 놓고 시부모님께서 종택을 지키며 살아오셨다. 황수석여사와 종손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인 1989년에는 그것마저도 오래되고 낡아서 사람이 살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해 사랑채를 새로 짓게 됐다. 1991년 황수석 여사 부부가 마을에 들어와 1993년에 현재의 안채를 짓고 이곳에서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황 여사 부부가 마을에 들어올 당시 시아버지와 마을의 유력한 어른들이 모여 제례와 상례법을 간소화했다. 집안에서 모시던 불천위제사도 모두 학록정사에 옮겨 학동선생과 민환, 민성 두 아들을 그곳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시아버지는 지난 5월에 97세로 돌아가셨는데 더욱 극진하게 모시지 못한 것 같아 죄송스럽기만 하다"는 종부."종부든 아니든 요즘 각박한 세상이어서 종가가 아니라 일반 사가라도 손님 오면은 접대하고 하는 것은 꼭 배워두는 것이 기본이다. 삶이란 그저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리에 역행하지 말고 아등바등 살려고 하지 말고 순리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의성문화유산보존회 김태홍 andong0319@hanmail.net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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