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장흥 천관산

암릉'다도해'억새 '3色 화음'

호남의 5대 명산(名山)을 논할 때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 변산, 천관산을 든다. 마니아라면 약간 의혹을 품게 된다. 내장산까지는 이의가 없다. 전국 10대 명산에 드니까. 변산도 매창과 유희경(劉希慶)의 세기적 로맨스가 있으니 수긍이 간다. 문제는 천관산이다. 솔직히 천관산은 주변의 팔영산, 제암산과 동급으로 여겨진다. 백보 양보를 해서 역사적 상징성이나 천혜의 암릉미에 후하게 점수를 준다쳐도 이 산이 천하의 무등산이나 해남의 준령 두륜산을 제치고 명산 반열에 이름을 올린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호남사람들이 이 산에 이토록 애정을 쏟은 이유는 뭘까.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오감(五感)을 열고 그 현장으로 다시 오르는 것이다. 호남의 중형(仲兄) 조계산까지 제친 천관산의 매력은 무얼까?

#'천관산' 80개 봉우리 면류관 주옥처럼 도열

면류관은 국가의 대제(大祭)때 왕이 쓰는 예모. 왕의 정복인 구장복에 갖추어 쓴 예관을 말한다. 그러면 천자(天子)의 면류관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주를 주관하는 천자 권위의 상징이다. 장흥에 가면 천자의 면류관과 만날 수 있다. 천관산엔 80여개의 봉우리들이 산능선을 따라 주옥(珠玉)처럼 도열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보옥(寶玉)을 늘어뜨린 면류관 같다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천관산은 호남정맥 끝자락에 위치한 723m의 아담한 산. 6개의 동천(洞天), 44개 영봉, 36개의 석대(石臺)를 갖추고 있다. 옛 문인들은 지제(支提), 천풍(天風)이라는 호를 지어 별도로 우대했다.

통일신라시대 때 이미 당나라 승려들이 유학을 왔을 정도로 이곳은 불교, 학문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 수많은 왕비와 왕족이 이 고을에서 나왔고 이 산자락 80여개의 사찰에서 28명의 대사가 배출됐다. 장흥은 또한 호남의 대표적 문향. 한국문학을 이끌고 있는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씨 등 시인, 소설가 70여명이 장흥의 산천을 자양분 삼아 창작의 활력을 얻었다.

등산로는 보통 관리사무소-금강굴-천주봉-환희대-구룡봉-억새밭-연대봉-양근암-관리사무소로 돌아오는 원점산행이 주종을 이룬다. 천관산은 전형적인 바위산. 그러나 오르막길엔 평탄한 숲길, 산책길이 이어져 여성이나 가족단위 등반객들이 즐겨 찾는다.

#대장봉 정상에 올라서면 장흥 앞바다 한눈에

이 산은 높이와 달리 탁월한 조망을 자랑한다. 정상에 서면 북으로 월출산, 무등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맑은 날 남으로 다도해 너머 한라산을 열어주기도 한다.

취재팀은 장천재를 출발해 천주봉에 이르는 등산로에 접어들었다. 선인봉에 이를 무렵 읍(邑)외곽 들판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산너울을 몇굽이 넘어 고흥 팔영산의 8봉능선도 흐릿한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찬바람을 뚫고 20분쯤 올랐을까 거대한 종모양을 한 종봉(鐘峰)이 나타났다. 이미 7부 능선을 넘어선지라 이젠 좌우로 천관산의 명품봉우리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봉우리들이 아직 많으니 동료들과 바위 모양에 맞는 이름을 붙여보는 것도 재미있다. 이때 당신은 천관화랑의 큐레이터.

천관산의 바위들은 참 기묘하다. 설악산이나 월출산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훨씬 정교하고 오묘한 것이 잘 관리된 수석을 대하는 느낌이다. 실학자 위백규는 "천관산은 예로부터 영묘하고 기이한 것으로 이름이 높아 두류나 서석 같이 높고 큰 산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산행시작 1시간 만에 정상능선인 천주봉에 이르렀다. 탁 트인 평원을 배경으로 환희대(歡喜臺)가 우뚝 서있다. '만권의 책을 쌓아 놓은 것 같다'는 대장봉 정상에 있는 이 대에 오르면 탐진강 평야부터 장흥 앞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환희대 조망의 환희를 만끽하고 일행은 구룡봉으로 향한다. 구룡봉으로 가는 500m 남짓한 등산로에는 억새가 무성하다. 가을의 잔영(殘影)인가. 전성기 은빛물결은 많이 퇴색했지만 가을 서정의 풍광은 아직 남아있다. 무채색 억새 숲을 배경으로 등산객들은 사진 찍기에 분주하다. 마치 9룡이 엉켜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구룡봉은 깎아지르는 협곡을 끼고 서있다.

전설에는 명주실 몇 타래를 풀어도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라고 전한다. 여기에 서면 두륜산과 해남쪽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룡봉의 관전 포인트는 오금이 저리도록 위태롭게 펼쳐진 협곡과 그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아육왕탑. 공깃돌을 포개 놓은 듯 4개의 바위가 교묘하게 겹쳐져있어 보는 이의 감동을 더한다.

#억새의 은빛물결 사이로 다도해의 푸른 바다

일행은 다시 연대봉으로 향한다. 천주봉에서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2, 3km 능선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품억새길. 가을이면 하얀 억새의 군무가 5만여평의 군락지에 운해처럼 펼쳐진다. 하얀 솜털 사이로 은빛물결은 여전히 빛난다. 천관산 최고봉 연대봉은 봉화대가 있던 자리.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이곳이 교통, 군사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일행은 하산 길로 접어든다. 정상의 억새레이스는 하산 길에도 여전히 펼쳐진다. 억새의 군무사이로 다도해의 푸른 바다가 비치면 산꾼들은 그 조망에 젖어 잠시 여독을 푼다. 하산 중간쯤 잔뜩 화난 남성의 심볼을 하고 있는 양근암(陽根岩)이 눈길을 끈다. 말수 적은 여자 등산객들도 이곳에서는 다들 한마디씩 보탠다. "아따! 거시기 참 징하구마이." 우연인지 양근암 밑으로 커다란 굴이 나있다. 음양을 적절히 배치한 조물주의 배려가 놀랍다.

일행은 장천재를 지나 다시 주차장에 도착했다. 20여리길 산행을 모두 끝내고 내려온 길을 되짚어본다. 이 조그만 바닷가 산이 어떻게 호남의 명산 반열에 들을 수 있었는지 품었던 의문이 완전히 풀렸다.

산은 단순 높이와 경치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외에 역사성과 상징성까지 갖추어야 진정한 진산(鎭山) 대접을 받는 것이다. 인문지리학적으로 장흥은 호남의 중요한 문향중 하나이고, 천관산엔 역사와 상징성에 지역민의 자부심까지 서려있다. 더욱이 이미 천자의 면류관을 얻었으니 그 후광 하나만으로도 호남의 명산 대접을 받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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