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국, 그리고 나]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화려함 뒤에 숨겨진 어두운 역사의 얼굴

새해 첫 날 신문을 집어 들자마자 나는 너무 놀라 신문을 떨어뜨릴 뻔 했다. 신문 1면 한가운데서 튀어나올 듯 으르렁거리는 백호 때문이었다. 커다란 얼굴을 뒤덮은 허연 털 속에서 서슬 퍼런 눈매는 더욱 번뜩였고 시뻘건 입속에서 잔뜩 기운을 물고 있는 날카로운 송곳니는 금방이라도 덥석 나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나는 신문을 좀 멀찍이 놓아두고 한참 녀석을 구경했다. 그러다 며칠 후 아닌 겨울에 중무장을 하고 동물원 여행을 떠났다.

근대 최초의 동물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 유명한 프랑스 파리 근교의 베르사유 궁전에 그 원형이 있다. 육각형으로 둘러싸인 6개의 방은 각각 6대주에서 잡아온 동물들이 갇혀있었고 사람들은 가운데 탑 위에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는 신들처럼 동물들을 구경했다. 절대왕정 시대 해외식민지를 건설하며 국력을 뻗치던 프랑스 왕실이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고안해낸 아이디어였다. 당시 이국의 신기한 동식물들은 명문가나 왕실에서 인기 있는 수집품이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 신기한 수집품들 중에 인간이 있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잡아온 원주민들은 프랑스인들에게 코끼리나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신기한 동물'이었다는 것이다. 원숭이와 함께 갇혀 있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창살을 붙들고 무언가 말을 하여도 프랑스인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언어는 원숭이의 울음소리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으로 남겨진 과거의 유명한 건축물들에는 모두 어두운 역사의 맨얼굴이 감춰져있다. 베르사유 궁전을 찾았을 때 나는 어릴 때 봤던 만화영화 '베르사유의 장미'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떠올렸다. 긴머리를 휘날리는 미남청년 오스칼과 가녀린 미소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는 물론 픽션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백성들의 가난을 외면하고 사치와 낭비를 일삼은 타락한 프랑스왕실의 대표주자였다. 그녀는 저 놀라운 동물원에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깃털부채를 부치며 인간을 구경하였을 것이고(물론 인간과 이국의 원주민을 구별하지 못한 그녀는 그 끔찍함을 몰랐겠지만), 프랑스혁명의 단두대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이것이 논픽션이다.

하지만 현대의 보살핌 덕에 더욱 멋들어진 베르사유 궁전에서 누가 그런 어두운 논픽션을 떠올릴까. 베르사유의 매표소 앞에는 과거의 식민지 원주민들이었던 아프리카인, 아시아인들이 전 세계 관광객들 속에 섞여 긴 줄을 서고 있다. 구경 온 관광객들이 워낙 많아서 궁전 내부에 들어가 보기 위해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베르사이유 안은 화려한 겉모습만큼이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휘황찬란한 금은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다. 관광객들은 엄청나게 많은 방들과 긴 복도와 영화에서만 봤던 왕가의 초상화들과 인형의 방처럼 비현실적으로 깜찍한 공주방들을 신기하게 구경한다. 하이라이트는 거울의 방이다. 방 길이가 무려 73m, 너비는 10m가 넘고 천장은 까마득한 13m 위에 걸려있는 이 넓은 방에는 정원을 향한 벽에 17의 창문이, 반대편 벽에 17개의 거울이 눈부시도록 화려한 빛을 반사한다. 프랑스 왕실은 당시에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최고수준의 유리세공술을 자랑하기 위해 이 놀라운 빛의 방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나간 역사의 화려한 건축물은 21세기 인간들에게 그 옛날 식민지의 동물들만큼이나 신기한 구경거리가 된다. 지금 나는 동물원을 구경하듯 오래된 궁전을 구경하고, 원숭이를 구경하듯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구경한다.

거대한 궁전 내부를 탐험하느라 몹시 지친 나는 관광객들에게 떠밀리듯 궁전 밖으로 나왔다. 궁전 안만큼이나 붐비는 유명한 베르사이유의 정원을 흘낏 보다가 베르사유 뒤편의 산책로로 방향을 잡았다. 우아하게 뻗은 가로수들이 싱싱하게 늘어선 기분 좋은 산책로였다. 베르사이유가 사정없이 뿜어내는 온갖 휘황찬란한 광채에 지친 눈이 쉬어가기엔 그만이었다.

과천 동물원의 백호는 지독한 한파에 잔뜩 웅크리고 나오지 않았다. 나는 추위를 피해 실내전시관이 있는 유인원관을 구경 갔다. 작은 안경원숭이, 커다란 오랑우탄, 고릴라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나를 향해 무언가 울부짖었다.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원숭이와 함께 동물원에 갇혀있었던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을까. 동물원은 우리와 소통할 수 없는 존재(동물)들을 가둬놓고 구경하는 곳. 그래도 사람들은 구경하러 온 주제에 소통을 시도한다. 경인년, 창살 안의 백호야, 올 한 해 잘 되게 해줘.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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