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칠판 앞에 선 스승의 머리에는 어느덧 하얗게 서리가 내렸고 그 앞에 모여 앉은 제자 50여명의 이마와 눈가에도 주름이 생겨 있었다.
20일 오후 5시 40분 대구시 서구 내당동 광장코아 3층 웨딩홀. 지난달 퇴임한 손병현(63) 남부교육장의 기념 문집 '한 점 생각' 출판기념회와 정년 퇴임연에서 손 교육장의 마지막 수업이 시작됐다.
국어를 가르쳤던 손 교육장이 마이크와 펜을 잡고 50줄을 바라보는 제자들 앞에서 '용비어천가'를 강의했다. 달성고, 죽변종고, 경북고, 대구과학고 출신 제자들은 요즘 학생들의 교복을 빌려 입은 채 진지하게 수업에 임했다. 30년 세월이 흘렀지만 스승과 제자, 학생 동료 간 애틋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선생님, 숙제 검사는 안 합니까?" 누군가 크게 소리치자 와르르 웃음보가 터졌다. 손 교육장은 웃음을 머금은 채 "예습이 학력고사를 잘 치르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가볍게 받아쳤다.
어느새 지나온 세월을 잊어버린 듯 손 교육장의 고문(古文) 강의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손 교육장은 "용비어천가 내용처럼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기초가 튼튼해야 학력고사도 잘 칠 수 있다"며 강의를 이어갔다.
이날 수업은 1981년 손 교육장이 담임을 맡았던 달성고 동창회 7회 3학년 4반 동기들이 주도해 마련됐다. 학창 시절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기획한 이벤트였다. 손 교육장이 "오늘은 단축 수업이니까 질문은 다음 시간에 받겠다"며 30여분간의 '마지막 수업'을 끝내자 제자들은 감사의 인사를 올렸고 손 교육장의 가족과 선·후배 교사 등 50여명은 박수로 화답했다.
3학년 4반 실장이었던 권일경(48)씨는 "고교시절 몇 차례 충고에도 내가 담배를 끊지 못하자 정말 못 참겠다 싶을 때면 당신의 서랍 속에 있는 담배를 한 개비씩 가져가라고 하실 정도로 누구보다 학생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선생님이셨다"며 "오늘 선생님의 강의를 다시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1986년 경북고에서 담임 교사와 제자로 손 교육장과 인연을 맺은 김준현(43)씨는 "당시로선 드물게 학생들에게 매를 드는 대신 말씀으로 타이르는 등 정말 온화하고 이해심 깊은 분이셨다"고 추억했다.
1974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손 교육장이 교육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1994년. 이후 장학사와 연구사, 교장 등을 거쳐 교육장까지 맡은 터라 다시 강의를 한다는 것이 어색할 법도 했지만 수업은 매끄러웠다.
손 교육장은 "교육계에 발을 디딘 뒤 학생들과 부대끼며 산 것이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며 "여러 사람의 귀한 시간을 뺏는 것 같아 계속 사양했는데 끝까지 챙겨준 제자들이 정말 고맙다"고 웃음지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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