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막걸리 등과 함께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2009년 10대 히트 상품 중 하나, 모 온라인 쇼핑몰의 판매량 분석을 통해 밝혀진 한 해 동안의 히트 아이템 키워드. 다름 아닌 걸 그룹 이야기다.
이들은 지난 한 해 가요차트 1위의 63%를 차지했고 TV 예능 프로그램을 접수했을 뿐만 아니라 드라마, 뮤지컬, 영화 등에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걸 그룹 전성시대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소녀시대의 미니앨범 'Gee'에서 촉발된 걸 그룹 열풍이 일 년 남짓한 사이에 가요계를 넘어 우리 대중문화의 새로운 아이콘을 만들어 낸 셈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바라보는 일부 기성세대의 시선들은 좀 곱지 않아 보인다. 걸 그룹 열풍이 뜨거워질수록 오히려 그들을 향한 우려 섞인 비난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들려온다. 형편없는 가창력, 색깔 없는 음악, 가수로 위장한 댄서, 성의 상품화, 심지어 기획사가 조종하는 영혼이 없는 꼭두각시 인형들이라는 말까지 들린다.
1970'80년대, 청춘을 보낸 이들에겐 전설이 떠나간 자리에 열풍만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듯한 우리 가요계가 그리 탐탁지 않을 수 있다. 대중가요의 획일화, 매체의 독식을 문제 삼는다면 그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전역을 강타한 이 거대한 열풍을 겨우 꼭두각시 인형들이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획사가 만들어 낸 헛된 눈요깃거리에 마냥 혹할 만큼 이 시대의 대중들이 어리석지도 않다. 걸 그룹들은 발표하는 곡마다 퍼포먼스는 물론이려니와 패션, 메이크업, 심지어 액세서리 하나까지 완벽에 가까운 조합을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
한동안 우리 가요계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앗아 갔던 준비도, 재능도 부족했던 몇몇 댄스그룹들과는 달리 이들과 이들의 음악에선 더 이상 설익은 풋내가 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 전략 및 전술을 가장 창의적이고 효과적으로 구현해 낸 카피와 디자인의 조합처럼 이들의 무대는 문화상품의 기획 및 개발에 관한 교과서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문화가 산업이 된 시대, 이 히트작들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몇 안 되는 우리의 문화상품이기도 하다.
물론 소속사의 의도와 PD의 역할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연기자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해 내는 일은 어디까지나 걸 그룹 자신들의 몫이다. 형설지공이 이미 옛말이 되어 버린 지금에 와서, 그래도 가수는 달라야 되니 대중들이 불러줄 때까지 기타 하나 달랑 둘러메고 천하를 주유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따라서 걸 그룹 전성시대의 주역은 기획사나 매스컴이 아니라 바로 걸 그룹 자신들이며 그것을 가능케 한 주된 이유 또한 그들의 재능과 노력에 있다. 검증된 시장만 노리는 소속사의 얄팍함과 그로 인한 식상한 레퍼토리마저 덮어버릴 만큼 탄탄한 내공과 다채로운 역량을 갖춘 소녀시대, 파격이 주는 자유로움과 전율을 일으키는 울림을 선사하는 '2NE1', 은근히 강한 '카라', 매번 새롭게 변신하는 '티아라', 음악적 깊이와 여유가 보이는 '브라운아이드걸스'.
이들은 모두 흘린 땀방울과 꿈을 위해 견뎌낸 시간들만큼이나 차별화된 자신들만의 색깔을 분명하게 구축해 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녀시대' 태연의 가창력은 단연 돋보인다. 혼신을 다하면서도 관객의 몫으로 2%의 여유를 남길 줄 아는,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만큼 노래를 잘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마음을 열어 놓은 만큼 들린다. 시대의 뒤꼍으로 물러나 앉을 요량이 아니라면 비워내야 새로움이 들어설 공간이 생긴다. 그래야 호흡도 가벼워지고 스피드도 살아난다.
만약 걸 그룹들이 개별 멤버는커녕 그룹 간의 구분조차 의미가 없는 판박이 인형들일 뿐이고 그들의 음악 또한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다 똑같은 후크 송(Hook Song)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트로트는 다 그게 그거라서 남진과 나훈아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과 무엇이 다를까?
걸 그룹 열풍이 변방에서 부는 그들만의 미풍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움직일 만큼 강력한 바람이 되었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세상은 겪어 봐서 아는 게 아니라 당해 봐야 아는 것'이라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걸 그룹들을 향한 비판의 날을 세우기 전에 그들과 그들의 음악에 한 번쯤 제대로 당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어쨌든 한동안 잊고 지냈던 우리 대중음악이 다시 기대와 설렘으로 다가온다.
권은태 시나리오 작가'마루커뮤니케이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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