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음식을 즐기려면 격식을 갖춰야 한다. 주효(酒肴)가 아무리 미주진미라 하더라도 품격에 맞지 않으면 갓 쓰고 자전거 타기와 같다. 막걸리 안주가 비록 신 김치쪽뿐이라도 놋잔이나 사발잔으로 마신다면 흥취가 도도하다. 와인도 와인잔으로 마셔야 한다. 그러지 못할 바엔 차라리 마시지 않는 게 낫다.
맥주도 그렇다. 맥주는 태어날 때 손아귀에 낄 수 있는 유리잔과 함께 태어났다. 종이컵으로 맥주를 마시는 것은 '삐루'(Beer)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나 장소와 환경에 따라 격식은 달라질 수 있다. 논두렁에 앉아 새참을 먹을 때 마시는 막걸리는 주전자에 입을 대고 마셔도 그 자체가 격식이다.
와인잔이 없다면 투명한 생수병을 반으로 잘라 뚜껑 부분을 손으로 잡으면 훌륭한 와인잔이 된다. 옛 선비들도 술만 있고 잔이 없을 땐 가죽신을 벗어 마시고 대취한 적도 있다. 산중 변소는 숲속 소나무 밑이란 걸 알면 비데가 달린 좌식 변기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
#요정에서 마시는 청주 '손사래'
나는 막걸리를 좋아하고 흔히 '정종'이라 부르는 청주는 싫어했다. 이십대 중반에 신문기자가 되어 사회에 발을 딛고 보니 출입처에서 대접하는 회식자리의 술은 막걸리가 아니라 정종이었다. 당시는 요정문화가 절정인 시절이었다. 한복 입은 아가씨들과 얼려 술이 한 순배 돌아가면 이어 밴드가 들어와 가무음곡으로 이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출입처의 기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권하는 눈깔만한 정종잔은 별로 마실 것도 없는 데다 냄새까지 맘에 들지 않았다. 아직 아이나 다름없는 신참기자는 어른들이 권하는 잔을 주는 대로 마시고 보니 취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
하루는 대학의 은사님을 생맥주집에서 만나 요정에서 정종 마시기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교수님은 대뜸 하시는 말씀이 "술을 몸에 붙여라"였다. 몸에 술을 붙이는 방법을 여쭤봤더니 "정종은 좋은 술인데 자네 마음이 그 술을 밀어내고 있어"라고 말씀하셨다.
며칠 뒤 퇴근길에 교수님의 부름을 받고 정종전문집 '오뎅 다이'에 나란히 앉게 됐다.
"오늘 한 수 가르쳐주려고."
"예."
교수님의 강의는 의외로 간단했다.
"정종은 바깥 찬바람이 출입문 밑으로 기어들어와 발목이 시릴 정도가 되어야 맛이 나는 거야. 이렇게 오뎅 다이 가까이에 앉아 오뎅을 안주로 대폿잔으로 네댓 잔 마시고 난 후 맥주 두어 병으로 입가심을 하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지. 자네, 요정 정종이 맛이 없다 했제, 그 말 맞아."
교수님의 현장 강의를 듣고 난 후 여러 차례 실습을 해보니 정종이 손사래를 칠 정도로 싫은 술은 아니었다.
#잔 밖에서 넘쳐흐르는 술
어느 해 겨울 정종 대포 권위자인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제대로 격식을 갖춘 술판을 벌여 볼 요량으로 주변 친구 몇몇을 더 불러 팔공산 수태골에 자리를 마련했다.
그 당시는 팔공산 순환도로가 트이기 전이어서 무거운 정종 대병 두 개를 들고 한 시간 넘게 걸어야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오뎅 끓일 냄비와 간천엽 무칠 준비를 한 무거운 배낭을 짊어졌고 초대 손님은 술병을 들고 뒤를 따랐다. 그런데 계곡의 돌다리를 건너뛰다 그만 술병 하나를 깨뜨리고 말았다. 다급해진 친구는 몸을 굽혀 계류수 몇 모금을 들이켜더니 "야, 이건 맹물이야. 그새 다 흘러갔나봐"하면서 몹시 서운해했다.
술판의 격식은 대부분 준비하는 사람들이 갖춘다. 그러나 이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어서 한 병만 마시고 나머지 한 병은 계곡이란 큰 잔에 담아 두고 눈으로 즐기라고 하늘이 그렇게 정했나 보다. 멍석바위 술판에 둘러앉은 친구들은 술이 모자란다고 아무도 투정하지 않았다. 잔 밖에서 술이 넘쳐흐르는데 뭘.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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